14) 고린도
(1) 지명 연구
고린도( kor'-in-thos : 코린도스)는 ‘뿔’이라는 뜻으로 창건자 코린티엔시스의 이름에서 유래 되었다.
고린도는 B.C. 2세기에는 아가야 동맹의 주축으로 로마에 대항하는 강력한 힘을 보였으나 B.C. 146년 로마 집정관 뭄미우스(L Mummius)가 고린도를 점령하고 완전히 파괴하고, 남자들은 학살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리자 이후 100여년 동안 황폐한 상태로 버려졌습니다. 고린도가 되살아 난 것은 B.C. 44년 발표한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easar)의 법령에 의하여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되었을 때였습니다. 초기에는 도시 이름이 에푸라(Ephura 경계, 감시)로 불렸으나 새로운 창건자의 이름을 기념하여 ‘콜로니아 라우스 율리우스 코린티엔시스’(ColoniaLaus Julius Corinthiensis)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코린티엔시스가 바로 고린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현재 지명은 코린토스(Korinthos)이다.
(2) 역사 배경
고린도 만에서 3.2km 내륙의 아크로 코린쏘스산(해발 565m) 기슭에 자리 잡은 도시 고린도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B.C.3,000년경 금속도구로의 이행 흔적도 나타난다. B.C 2,000년경 황폐화 되었던 듯하고 B.C. 12세기경 도리아인들이 이 지역에 들어오고 B.C. 9세기에는 도리안식 문화로 바뀌었으며 7세기경에 페리안더(Periander,B.C625-582)의 통치 시절에 최대의 번영을 이루었다. 토기와 청동기 제품이 유명했으며 고린도만을 통해서 광범위한 지역으로 산물을 운송하여 번영하였다.
B.C. 5세기에 들어서는 주변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와 견줄 정도로 성장하였는데 특히 페르시아 침공 당시에는 육군과 해군의 강력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고린도는 아테네와 동맹을 맺었다가 스파르타와 마케도니아 연합군에게 함락되었다.
B.C. 3세기에는 아가야 동맹의 주축으로 로마에 대항하였으나 B.C. 146년 로마 집정관 뭄미우스(L Mummius)가 고린도를 점령하고 완전히 파괴하였고, 남자들은 학살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 이후 1세기 동안 황폐한 상태로 버려졌으나 B.C. 44년 발표한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easar)의 법령에 의하여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되었다. 초기에는 도시 이름이 에푸라(Ephura 경계, 감시)로 불렸으나 새로운 창건자의 이름을 기념하여 ‘콜로니아 라우스 유리우스 코린티엔시스’(ColoniaLaus Julius Corinthiensis)로 불리게 되었다.
재건된 후 전략적 요충지였던 고린도는 다시 번영하였는데 고린도 만의 레기온 항구, 샤론 만의 게그레아 항구 등에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한때 지진으로 파괴되었으나 로마의 지원으로 복구되었다. 바울이 이곳에서 전도하였으며 후에 아가야 지방의 감독의 공관이 고린도에 설치되었다.
그 후 A.D. 3세기부터는 이곳 고린도는 여러 민족의 지배를 받았으며, 중세를 거쳐 오스만투르크가 350년간 이곳을 지배한 후에는 시골 마을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나마 1858년과 1928년의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신 고린도는 이곳을 벗어나서 건설되었다.
오늘날 고린도는 이오니아해와 에게해, 그리스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 수에즈운하, 파나마 운하와 함께 세계 3대운하 중 하나인 고린도운하는 이오니아해의 코린티아코스만과 에게해의 사로니코스만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다.
고대부터 이곳에 운하를 건설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운하를 건설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신탁에 때문에 담대한 왕들도 공사를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로마의 네로황제가 유대인 노예 6,000명을 동원하여 67년에 고린도를 방문하여 착공하였다. 그러나 전체가 바위인 반도를 뚫는다는 것이 워낙 난공사여서 공사의 진척이 무척 더뎠다. 68년 6월 9일 모든 권력기반을 잃어버린 네로가 자살을 하자 스페인 총독 갈바(Galba)가 로마로 들어와 권력을 차지했다. 그는 경비가 많이 소요된다는 이유로 공사를 중단시켰다.(로마의 재정이 바닥이 나서 갈바는 그를 지지했던 친위병들에게 약속했던 포상금마저 지불할 수 없었다. 친위병이 등을 돌리자 권력을 잃은 갈바는 네로의 친구 오토의 선동에 의하여 69년 1월 15일 쿠르티우스 옆 포룸에서 목 베임을 당하였다.) 1800여년이 지난 1881년 공사가 재개되어 1893년 에 프랑스인 레셉스에 의해 길이6.3km 높이 80m, 폭 25m, 수심 7m에 달하는 운하를 완공하였다. 이 운하의 완공으로 펠레폰네소스 반도를 우회하여 에게해와 이오니아해를 오가는 선박의 운항거리가 320km나 단축되었다. 운하의 입구에는 양쪽을 연결하는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는 수면의 높이와 비슷하기 때문에 배가 운하를 통과할 때는 바다 속 30m 깊이까지 가라앉는다. 배가 지나가면 다시 올라와서 차와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게 하였다.
고린도에는 2년에 한 번씩 큰 운동경기가 있었다. 그 운동경기를 이스트미안 운동경기(Isthmian athletic games)라고 한다. 고대 경기에는 장거리 경주, 경마, 마차 경주, 씨름, 권투 , 노래와 시 경연 그리고 후대에는 짐승들과의 결투도 있었다.
운동선수들은 운동경기에 출전하기 위하여 10개월간의 강한 훈련을 받았다. 음식을 조절하고, 술을 금하고, 극기하며, 운동시간, 수면시간도 모두 조절하였다. 감도들로 매도 많이 맞았다. 인내, 극기, 강한훈련을 받았다.
(3) 성경 본문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 18:1-4). |
바울의 사역의 대한 태도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빌 3;13) 좇아가는 태도이다. 바울의 고린도 사역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는 18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전도활동을 했다(행 18:11). 고린도는 주요한 도시로 상업의 중심지요, 아가야 지방의 총독 갈리오가 거주한 곳이었다. 고린도는 많은 종족과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든 국제 도시였다. 그리고 여러 가지 면으로 향락에 도취된 도시요 부도덕한 도시였다. 아덴의 사람들이 지성적인 분위기를 좋아하는 반면 고린도 사람들은 육감적인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시아 본도 출신의 유대인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 같이 기거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장막을 만드는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바울과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면서 복음사역의 동역자들이 된 것이다.(행 18:18,26; 롬 16:3; 고전 16:19; 딤후 4;19).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서 크리스토스 논쟁으로 분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추방한 사건으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이달리아로부터 고린도에 들어오게 되었다.
바울은 매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평일에는 장막을 만들므로 생계를 꾸렸다.
(행 18:5-6)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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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니아로부터 고린도에 도착하자,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 하기 시작하였다. 십자가에서 죽은 나사렛의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복음을 전하자, 고린도의 유대인들도 데살로니가처럼 극심하게 대적하며 훼방하기 시작하였다. 고린도에서도 바울은 훼방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로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행 18:6)고 선언하고, 유대인의 회당을 떠나서 헬라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행 18:7-8)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
회당에서 쫓겨난 바울은 회당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었고,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다. 점차로 믿고 따르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고린도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나갔다.
바울은 이때에 고린도에서 심각한 정신적 고심을 감수한 것으로 믿어진다. 그는 이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두려워 떨었지만 환상을 통해 주님의 격려를 받았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9.10). 바울은 고린도에 있을 동안 자신이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고백한다(고전 2:1-5). 이처럼 바울이 고린도에 설립한 위대한 교회는 많은 해산의 진통을 통해 태어나게 된 것이다(고전 4:15).
(행 18:12-17)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
고린도에 있는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끌고 가서 아가야 총독 갈리오에게 “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라고 고소하였다. 로마식민지 통치시대의 재판관은 각 관할지역의 총독들이다. 갈리오(Gallio) 총독은 비마(Bema: 재판석)에 서서 말하기를 바울에게 어떤 범죄 사항이 있으면 총독인 내가 판결하려니와 너희의 법(율법)에 관한 것은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고 기각하여 유대인들과 바울사이의 종교적 갈등은 당사자들끼리 처리하라고 하면서 나는 그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치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현명한 판단으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잘 구별하였다. 국가는 교회가 도덕적∙윤리적 불법행위를 범하지 않는 한 교회를 간섭할 이유도, 권리도 없다. 갈리오 총독은 매우 냉철하고 공정한 사람으로 현명한 판단을 한 것이다.
(4) 동역자 :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행 18:2-3)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 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부부이다. 사도행전 18:2에 아굴라가 본도에서 난 유대인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브리스길라 형태로 보아 그녀가 로마 태생이라고 생각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두 사람의 이름이 병기될 때 그녀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어있는 사실로부터 그녀가 남편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었다고 짐작된다(롬 16:3,딤후 4:19,고전 16:19). 바울은 그녀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행 18:1-3,18,26,롬 16:3,4,딤후 4:19). 이 부부는 바울의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겠다고 한다.
아굴라는 본도 태생의 유대인인데, 아내 브리스길라(브리스가)와 같이 로마에서 살고 있었다. 글라우디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이 내렸을 때(AD 52년) 로마를 떠나 고린도에 이주하여 거기서 천막 짓는 업을 했다. 동업상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그의 집에 머물면서 그들 부부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행 18:1-3). 그들은 바울의 동역자로서 고린도에서 에베소에 갔다(행 18:18,19). 고린도전서에서 그들은 바울과 같이 아시아 교회(아마 에베소)로부터 문안 인사를 보내고 있다(고전 16:19). 에베소에서 그들은 아볼로를 만나자 그를 초청했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들었다(행 18:26). 그리고 그들은 한 때 로마로 갔던 것으로 보이나(롬 16:3),다시 에베소로 왔다(딤후 4:19).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대략인데, 이 사실로부터 자연히 추측되는 것은 교회에서 브리스길라가 남편인 아굴라보다 능동적인 활동가였다는 것이다. 이 설을 지지하는 이는 크리소스톰인데, 그는 자세히 `하나님의 도'(행 18:26)를 풀어 이해시켜 아볼로에게 도움을 준 것은 그녀였다고 한다. 하르나크는 이 증언에 근거하여 히브리서의 저자를 브리스길라라고 하는 교묘하고도 엉뚱한 설을 주장했다. 로마의 비문이나 또는 전설에서 브리스가(Prisca, 바울이 쓴 것과 꼭 같은 철자로) 또는 그 지소사(指小詞) 브리스길라(누가가 쓴 애칭)의 이름이 매우 존귀히 여김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호르트(Hort)는 그녀는 로마의 명문 출신이었다고 결론 짓고 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로마에서 추방된 것은 AD 52년이라고 한다. 그들이 추방당하기에 이른 유대인들의 소요(騷擾)는 `크레스타스(Chre\stus)의 교사에 의해' 일어났기 때문에, 브리스길라는 바울을 알기 전에 이미 기독교에 동정을 가지고 있었음은 전연무근한 것은 아니다. 이 가정으로 볼 때 고린도에서 바울을 그들의 집으로 기꺼이 맞아들인 것은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다. 큰 은혜를 받은 것은 그들뿐만 아니라 람제이(W. Ramsay)가 암시하고 있듯이, 이방인의 사도는 "교회 발전에 있어서 로마의 중심적 중요성을 배웠을 것이다…" 우리는 이 교우(交友)와 로마, 그리고 서부의 교회에 대한 바울의 계획의 성숙과를 관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 후 얼마 안 있다가 완전히 성안(成案)된 사실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행 19:21,롬 15:24). 고린도에서 바울이 18개월 동안 체류한 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그를 에베소에 동반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집에 모여 예배드리고, 또 고린도전서 16:19에 의하면 바울이 다시 그들의 집에 유숙하고 있었다.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기간 중 그들은 에베소에 머물렀는데, 당시 대학자이며 능변가였던 알렉산드리아인 아볼로가 와서 그들의 원숙(圓熟)한 크리스찬 경험에 의해 큰 유익을 받고, 또 그 중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으로부터 은혜의 복음을 섬기는 능력의 비결도 전수 받았다(행 18:26-). 또 그들은 거기에 많은 이방인 교회를 세웠는데, 그 신자들은 바울을 지키기 위해 자기들의 목숨마저 버리려고 했다(롬 16:3,4). 이 구절로 부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잠시 로마에 이주하였는데, 거기서도 따뜻한 그들의 가정은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소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이 믿음직스러운 우인(友人)으로부터 기쁜 소식을 받고 로마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 보기를 열망하기에 이른 것이리라(롬 1:11). 이 경건한 가정에 대한신약성경의 마지막 인용은, 그들이 에베소에 돌아온 것이다(딤후 4:19). 그들과 디모데와의 교제는 반드시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게" 했을 것이다(딤후 2:1).
(5) 서신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기록
고린도에서 일 년 육 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바울은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들도 함께 돌보고 있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약 3주간을 머무르며 전도하였고,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베뢰아로 도피하였다가 실라와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혼자서 아테네로 떠나야 했었다(행17:14-15).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의 짧은 체류에 대하여 복음 전도를 시작만하고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매우 안타까워했다. 바울이 아데네에서 사역하는 동안 디모데가 도착하여 그 후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후에 고린도에 도착하여 상주하고 있는 동안,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를 써서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냄으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지도하고자 했다.
① 배경과 목적
바울은 마음으로는 데살로니가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사단이 그를 막고 있어서” (살전2:18)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바울은 자기를 대신하여 디모데를 다시 데살로니가로 되돌려 보내었다 (살전 3:3) 디모데와 실라는 상당한 기간 동안 데살로니가에 머물면서 바울을 대신하여 마케도니아 지역의 교회들을 돌보고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 지방에서 1년 반 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를 성령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하여 보냈다.
㉠ 데살로니가전서
바울이(1:1-2, 16:21), 고린도에서(3:1,2), A.D. 51-52년경,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새 신자들이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도록 권면하기 위하여 (살전 3:3-5), 경건 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살전4:1-8), 일상생활에 충성하도록 하기 위하여 (살전4:11-12),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 떠난 신자들의 부활과 생존 성도들의 변호와 휴거에 대한 소망을 위하여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하였다.
㉡ 데살로니가후서
실라와 디모데가 데살로니가전서를 전달하고 고린도로 돌아온 후 다시 말하면 사도바울이 고린도에서 A.D. 51-52년경,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한 후 약6개 월 후,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사도바울은 이탈리아에서 온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천막 제조업(tent-maker)을 하면서 데살로니가 전서를 기록하여 보냈다(행18:1-3).
데살로니가후서는 데살로니가전서와 내용이 매우 유사하다 그러므로 환난당하는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살후1:4-10), 믿음에 견고히 서도록 하기 위하여(살후2:13-3:15),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살후2:1-12) 데살로니가후서를 기록하여 보냈다.
고린도바울기념교회
고린도 올드시티 (바울이 복음을 전하였던 비마)
고린도 올드시티 (제우스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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