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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3. 아덴
박진숙 2017-01-17 추천 0 댓글 0 조회 1224

 

2.2.13. 아

 

   (1) 지명 연구

  아덴(ath-ay-nahee : 아데나이)는 여신 아테네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리스 신화에 나온다. 아테네가 세워졌을 때 이 도시의 주도권을 놓고 포세이돈과 아테네 여신이 다투었다. 결국 이 도시에 유용한 것을 가져오는 자가 이기는 것으로 정했는데 포세이돈은 짠물을 가져왔고, 아테네는 기름을 짤 수 있는 감람나무를 가져왔다. 결국 승리는 아테네에게 돌아갔고, 도시의 명칭도 아테나의 이름을 따서 아테네로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지명은 아티나(Athina)이다.


   (2) 역사 배경
 
  그리스에는 B.C. 7000-4000년의 석기시대와 B.C. 3000-1000년의 청동기 시대를 지나며 도시가 세워졌는데 B.C. 3000년 경에는 이미 금속 세공술이 들어와 그리스 남부 지방에 미노아 문명, 아틀란티스 문명, 미케네 문명 등으로 이어지는 문명의 역사를 이루었다. B.C. 1500-1200년 경에 만들어진 점토 여신상들을 볼 때 이 시기에 많은 신들을 섬기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아테네(아덴)에는 북쪽의 파르니사 산(1,143m), 북동쪽의 펜텔리 산(1,109m), 남동쪽의 이미투 산(1,026m) 등 삼면의 산과 서쪽의 사로닉 만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있는 도시로 B.C. 3000년경에 이미 정착민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아테네는 그리스 남부 지역에 델로스 동맹을 맺고 발전을 하였는데 경쟁 대상이었던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맺고 아테네와 경쟁하였다. 이 두 세력은 그리스 지역의 패권 다툼을 벌이며 발전하였는데 이들의 투쟁은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잠시 중단되었다. B.C. 490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다리오 B.C. 486년 사망)가 침공하자 아테네는 10,000명의 군대와 플라타이아(스파르타)에서 온 1,000명의 지원군과 함께 마라톤에서 대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아테네군의 전사자는 192명, 페르시아군의 전사자는 6,400명이었다. 이어서 다리우스의 후계자인 크세르크세스는 엄청난 대군을 몰고 그리스를 침공해 왔다. 이에 대항해서 스파르타는 육군으로 아테네는 해군으로 페르시아와 2차 전쟁을 했는데 아테네에서 180km 떨어진 동쪽 해안가에 위치한 세르모필레스에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를 중심으로 하는 7,000명의 병력과 해군 전략가인 아테네의 세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300여척의 함대가 페르시아와 2차 전쟁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는 배신자의 밀고로 참패하고 페르시아 군이 아테네까지 들어와 파괴와 방화를 하였으나 시민들 대부분은 펠로폰네소스 지역으로 피신한 뒤였다. 이후 아테네 함대는 사로닉 만에의 살라미스 섬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고 스파르타는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아테네는 미깔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페르시아에 패배를 안기고 전쟁이 끝났다.
  페르시아와의 2차 전쟁 후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다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그리스인들의 자멸전쟁이라고 부른다. 승리와 패배가 교차하면서 405년 아테네 해군이 페르시아의 도움을 받은 스파르타 해군에 패배당하고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이듬해 아테네가 항복함으로 아테네의 번영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페르시아가 침략함으로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혼란기에 빠진다.
 B.C. 338년 북쪽의 마케도니아 필립 2세에 의하여 그리스가 통일이 되고 B.C. 336년 필립2세가 암살당한 후 주범을 처벌한 알렉산더가 그리스 융성기를 재현하여 유례없는 정복전쟁을 통하여 헬라의 문화가 세계로 뻗어나가게 된다.
  아테네에는 세계문화유산 1호로 지정된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를 중심으로 주변에 아레오스파고스(아레오바고), 필로파푸스, 프닉스 등이 있다. 아테네는 B.C. 900년경부터 번영하였으며 왕정과 귀족정치를 거쳐 B.C.6세기 초기에 솔론(Solon)에 의하여 아테네의 민주주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아레오바고 아래쪽에는 아고라(광장)터가 있는데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건물과 신전들의 기초가 발견되었다.
  페르시아 침공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많은 건축물들이 파괴되었으나 그들이 물러간 후에 파르테논 신전과 프로필레아가 재건되었고, 파르테논 옆에 엘렉티온 신전이 세워졌다, 그리고 헤파이스토스(또는 테세우스)신전이 아고라에 세워졌다.
  B.C. 4세기경에는 아테네의 경제장관 리쿠르구스(Lycurugus B.C. 338-326)는 공공건물 건설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때 디오니소스 극장이 세워지고 아테네의 경기장이 건설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제우스 신전이 웅대한 규모로 재건축되었고, 버가모의 앗탈루스 2세에 의하여 아고라 남쪽에 거대한 주랑이 세워졌고, 이 건축물은 현대에 들어서 아고라 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재건되었다.
 B.C. 86년 로마 제국의 술라(Sulla) 장군에 의하여 아테네가 함락되었을 때 개인건물들이 주로 파괴되었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공공건물들이 더 많이 건축되었고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는 아우구스투스 신전도 건립되었다. 로마는 아테네의 과거의 영광스런 문화를 인정하여 자유 도시의 지위를 부여했다.
  아테네는 우상이 가득한 도시이다. 아테네 광장에 서 있던 우상만도 300개가 넘었으며 기타 신상들을 모두 합하면 3만개가 넘었다. 아테네 거리에서는 사람을 찾기보다 신을 찾기가 더 쉬웠다. 철학과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이기도 했으나 부도덕하며 음란한 도시이기도 하였다.
  아테네에 도착한 바울은 회당, 아레오바고, 시장 등에서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과 토론을 하였다. 어쩐 일인지 바울은 아테네에 교회는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신앙의 유산이 후대에 이어져 파르테논신전은 교회로 사용되었고, 아테나 여신의 신전은 성모 마리아를 위한 교회로 바뀌었다.
  아테네는 그리스가 터키로부터 독립하기 이전에는 인구가 1만 명도 되지 않은 소도시였으나 1830년 3월 25일 독립한 이후에는 그리스의 수도로서 2001년 3월 기준으로 356만 명 인구의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임영재, op. cit., pp.231-233.

  당시 로마, 고린도, 에베소, 다소,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등 대도시들에 비하면 인구 약 25,000명의 매우 작은 도시였다. 그러나 아덴은 B.C. 5-4세기에 이미 철학 문학 웅변 건축 조각 교육 음악 체육 등에서 세계 최고의 영화를 누리기 시작하였다.
아덴의 철학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제노 등에 의하여 꽃을 피웠다. 고대 아덴의 철학은 지금까지도 철학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는 아덴 중심의 철학을 일반적으로 헬라 철학이라고 부른다.
아덴의 조각과 건축은 우상들을 조각하고, 신전들을 건축하므로 더욱 발달되었으며, 아덴은 작은 도시로 헬라-로마 세계의 지적 수도(intellectual capital)이었다. 사실 아덴은 고대 헬라인들에게 최고의 지성과 문화의 도시였다.
로마는 B.C. 146년 아덴을 점령하고 아덴의 문화는 로마제국 전역에 확산되었다. 따라서 로마제국 시대 정치와 군사 면에서는 로마가, 문화와 예술 면에서는 헬라가 지배하였다.
아덴은 고대(古代)에 가장 관심 있고 잘 알려진 도시들 중 한 곳이었다. 현재는 그리스에서 제일 큰 도시이며 또한 수도이다. 조영엽, op. cit., pp.233-234.

 

 

  (3) 성경 본문

 

 

 (행 17:16-18)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 할 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아덴 시는 우상의 도시였다. 우들이 가득 하였다. 길가마다, 골목마다, 집마다, 신전마다, 공공건물마다, 장터마다 우상들로 가득 찼다. 공공건물들에는 신들(gods)에게 제사하는 제단들(altars)이 적어도 하나 이상 있었다. 아덴에는 우상이 3만 개 이상이 있었으니 아덴의 사람들보다 우상들이 더 많았고, 아덴에 있는 우상들은 그리스 전역에 있는 우상들보다 더 많았다.
  바울은 배 타고 아덴의 항구로 들어가면서 웅장하게 우뚝우뚝 솟은 신전들과 신들의 동상들을 보고 놀랐고 가슴 아파하며 영혼구원 사명에 더욱 충성하도록 결심하였을 것이다. 조영엽, op. cit., pp.235-236.

  아덴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들을 배출한 유력한 도시였다. 그러한 전통 위에서 철학과 사상에 과한 대중적인 연설과 토의가 성행하고 있었다. 바울은 어떤 쾌락주의자(Epicureen) 쾌락주의는 사모스 섬 태생의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B.C. 341~270)에 의해 설립된 철학의 일파로써, 감각적 쾌락, 또는 행복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쾌락은 육체적 쾌락이라기보다는 육적인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마음의 행복을 말한다.
와 스토아학파(Sroics) 스토아학파는 제논(B.C. 335~263)을시조로 한 그리스의 철학의 일파로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 철학을 대표했다. 스토아학파는 이성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이성에 기초한 덕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었다.
 철학자들과도 쟁론을 벌렸다. 이들은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의 전함을 듣고, 외국의 새로운 종교와 사상을 기준하고, 바울을 아레오바고로 초대하여 강론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조지연, op. cit., pp.175-176.
 

 

 (행 17:19-34)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아레오바고 설교(행 17:22-31)는 바울의 전도방법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바울은 저들이 섬기는 제단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비명을 보고 그것을 전도의 접촉점으로 삼는다(행 17:23). 그는 아덴사람들이 신에 대한 모든 관심과 경건에도 불구하고 참다운 신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증거 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에게 참 신에 대해 선포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요, 주재자로서 손으로 만든 전에 사시지 아니하시고 물질적인 제사에 관심이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세상과 인류를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인간은 그를 하나님으로 알아야 하고 또 찾아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우상 섬기듯 하나님을 섬긴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이 알지 못하는 시대에는 이를 허물치 아니하셨지만 이제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그를 믿어야 한다고 선포했다. 이는 심각한 도전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로써 세상을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행 17:31). 그리고 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누가는 바울이 아덴에서 이방인들에게 행한 설교를 요약하여 기록했다. 그 설교의 내용으로 보아 바울은 이방인들의 철학적인 사고방식을 이영하여 그들에게 접근했고 도전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선포하기 전에 예수님의 생애, 그의 수난 당하심, 그의 죽음, 그리고 그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 등에 대해 더 증거 했을 수도 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부활을 비웃기도 하고, 혹은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며 떠나 버렸다. 몇 사람이 바울을 친하여 믿었는데, 그 중에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 다마라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이 었다. 바울의 아레오바고의 설교는 그 뿐이었다. 실로 실망스럽고 미미한 반응이었다. 이에 대하여 F.F 부르스는 다음가 같이 논평하고 있다.

 

“아테네에서는 바울에게 아무런 폭해옫 가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증거를 정중하게 환대하며 오락거리로 삼는 것은 폭행보다 더 난처한 일이었다. 적어도 폭행을 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증거를 듣고 어떤 영향을 받았음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선교 사역에 있어서 아테네는 어느 다른 도시보다 고무적이지 못했다.”


  

  (4) 아레오바고 ( Areio" pavgo") 

  아레오바고는 당시 아덴의 사법, 민법, 그리고 형법 등 제반 사건들을 재판하는 법정 곧 고등 사법기구(high judicial body)였다. 아레오바고는 12인으로 구성되었다. 오늘 날도 그리스 대법원(Greek Supreme Court)을 아레오바고라 한다.
  아레오바고는 헬라어로는 아레스(Αρεσ; Mars;화성)와 파고스(Παγοσ ; Hill; 언덕) 두 단어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아레오바고는 “아레스의 언덕”(Hill of Ares)이라는 뜻으로 그 이름을 따라 “아레오바고”라고 불렀다. 아레스(Αρεσ ;Mars;화성)는 그리스의 번개와 전쟁의 신(god of thunder and war)이다.
  아레오바고는 아크로 폴리스 바로 서쪽, 아고라(ἀγορά;장터) 남쪽 115m 크기의 암석으로 된 바위 언덩을 지정하는 지명(地名)과 함께 아덴의 시의회를 뜻하는 의미도 갖게 되었다. 사도바울은 이 바위 언덕에서 설교하였다.(행 17:33)
  아레오바고는 B.C. 5세기경 아덴의 황금시대부터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제반 문제들을 판결하는 법정이었다. 소크라테스도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로마제국 시대에는 아레오바고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어 종교와 교육 분야만 판결하는 법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정치적, 사회적 제반 사건들을 로마제국이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이 장로들과 논쟁을 하였던 아덴의 아레오파고스 (1) 

 

바울이 장로들과 논쟁을 하였던 아덴의 아레오파고스 (2) 

 

소크라테스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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