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데살로니가
(1) 지명 연구
데살로니가(Qessalonivkh : thes-sal-on-ee'-kay : 뎃살로니케)는 ‘승리’라는 뜻의 (nivkh : nee'-kay : 니케)에서 유래 되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카산드라는 알렉산더의 이복누이인 데살로니가와 결혼을 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권력 유지에 불안을 느낀 카산드라는 알렉산더의 모친과 자신의 아내 데살로니가, 그리고 아들 록사니까지 죽였다. 알렉산더를 추종하던 백성들은 당연히 카산드라에게 강하게 반발하였고, 이것을 무마하기 위하여 큰 항구도시를 건설하고 알렉산더의 누이이며 자신의 아내였던 데살로니가의 이름으로 명명하였다. 이 외로도 데살로니가란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B.C. 338년 그리스를 통일한 필립 2세(알렉산더의 아버지)가 건설하고 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설과 필립 2세의 그리스 통일전쟁 당시 데살로니가인들에게 승리를 거둔 기념으로 도시를 건설했다는 설도 있다. 현재 지명은 테살로니키( Thessaloniki)이다.
(2) 역사배경
데살로니가는 현재 그리스어로는 세살로니끼라고 부르는 마케도니아의 주요 항구도시이다. 에게 해 북쪽의 터마 만을 끼고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고, 인구가 100만을 헤아릴 정도로 큰 도시였다. 데살로니가 역시 이그나티아 도로의 영향권에 있었다. 데살로니가 서쪽에는 북쪽의 발칸반도를 통해서 로마로 향하는 이그나티아 도로와 동쪽으로 이스탄불과 소아시아 지역으로 뻗어가는 이그나티아 도로, 그리고 그리스 남부 아테네와 고린도로 이어지는 이그나티아 도로가 교차하고 있다. 이러한 교통로는 데살로니가를 상업적으로 매우 번성하게 했으며 유럽과 소아시아를 연결하는 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게 하였다. 사람들이 직업을 구하기가 수월하여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도시의 초기에는 카산드라가 점령한 26개 지역의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서 정착하게 했고 이후로는 유대인과 이집트인들이 많이 살게 되었다.
데살로니가는 B.C. 167년 마케도니아가 네 구역으로 나뉠 때 둘째 구역의 수도가 되었고, B.C. 148년 마케도니아가 되었을 때 로마 행정부가 소재한 중심도시가 되었고, 로마는 데살로니가를 자유도시로 선포하였다.
도시 한 가운데에는 포장된 광장이 있었는데 자그마치 길이가 100m 넓이가 64m나 되었다. 동쪽에는 코린트식 기둥이 이중으로 주랑을 이루었고, 바닥은 모자이크 무의로 장식되어 있었다. 남쪽에는 하나의 주랑이 있었고 그 지하에는 기독교인들이 그린 벽화가 있는 방들이 여러 개 있었다. 광장 동쪽에서는 갈레리우스(Galerius 293-311) 궁전이 발견되었는데 곁의 팔각형 건물과 연결되어 있다. 이 건물은 여러 부속건물들과 함께 예배당과 세례당으로 사용되었다.
1876년 파괴된 로마식 아치의 바르다르문에서 나온 비문에는 사도행전 17장 6절에 나오는 읍장이란 단어가 나오며, 사마리아 공동체가 있었다는 내용도 있다.
데살로니가(Thessalonica)는 유럽의 관문인 마게도니아 지방의 칼시더스반도 서쪽 가장 큰 더마익 만(Thermaic Gulf)어귀에 위치한 중요한 항구도시로 헬라 신화의 본산인 2,917m높이의 올림푸스산(Mt.Olympus)이 보이는 곳이다. 한국의 백두산(2,744m)보다 더 높다. 데살로니가 지역에는 신석기 시대(Neo-Lithic)부터 사람들이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데살로니가는 예술, 음악, 철학 등의 중심지였다.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 군사 요충지, 로마제국의 마게도니아(로마제국의 행정구역)의 수도였다. 당시 인구는 유대인을 포함하여 약 22만 명 정도였다.
데살로니가는 비잔틴 제국시대(A.D. 395-1453)에 이르러서는 마게도니아 지역에서는 가장중요한 정치적·경제적 중심지가 되었다. 데살로니가에는 비잔틴시대 초기에 세워진 대표적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기 직전에 순교한 성 디메트리우스 기념교회이다. 410년에 건축되었으나 1917년 데살로니가의 대화재로 크게 파손되었고 교회의 지하 부분만 원형이 남아있다.
(3) 성경 본문
(행 17:1-9)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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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일행은 빌립보를 떠나서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경유하여 데살로니가에 도착했다. 데살로니가에는 빌립보와는 다르게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었고, 그들의 회당도 있었다.
바울은 이 도시 회당에서 연속으로 세 안식일에 복음을 선포했다(행 17:2).
바울의 복음 선포는 세 가지 특징을 포함했다.
첫째, 바울은 구약성경을 사용해서 예수님의 사건을 설명했다(행 17:2). 이런 방법은 예수님의 방법과 같은 방법이다(눅 24:27,44).
둘째, 바울은 복음의 핵심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임을 확실히 한다(행 17:3). 오순절 이후 선포된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었다(행 2:23-24; 3:15; 4:10; 5:30; 10:39-40; 13:27-30).
셋째, 바울은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선포했다(행 17:3). 이는 베드로가 오순절 때 선포한 내용과 일치한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이처럼 바울은 구약을 사용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증거 했다. 그 중에 몇몇 유대인들과 많은 경건한 이방인들 그리고 상당수의 귀부인들이 복음을 믿어 적은 교회가 그곳에 설립되었다(행 17:4).
연속 세 안식일이라는 표현은(행 17:2) 유대인들이 회당사용을 허락한 기간을 가리킨 듯하다. 유대인들은 곧 소동을 일으켰다(행 17:5). 이로 인해 바울은 선교활동에 회당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믿는 성도들을 다른 장소에 모이게 하여 그들을 계속 가르쳤다. 그 폭도들이 고발하는 내용은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행 17;6.7). 이런 비난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 13:1의 내용과 비슷한 대답을 했을 것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유대인들의 분노와 그 성에서의 소동으로 인해 복음을 받고 예수를 믿은 제자들은 사도들을 베뢰아로 보내게 되었다.
데살로니가 디미트리오스교회 (1)
데살로니가 디미트리오스교회 (2)
데살로니가 디미트리오스교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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