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명 연구
더베(der-bay' : 델베)이다. 소나무의 한 종류인 ‘더베 나무’에서 비롯되었다. BC 25년 갈라디아 왕 아뮨다스의 사후 로마 영으로 되었고, AD 41년 글라우디오 더베(Claudio Derbe)라는 명칭을 얻었다. 현재 지명은 케르티 훼육(Kerti Höyük)이다.
(2) 역사적 배경
더베는 남부 아나톨리아의 중부지역에 있는 한 고원지대인 루가오니아라는 지방의 한 도시인데 이 지바의 중심도시는 이고니온이다. 하지만 이고니온은 브루기아인들이 거주한 중심지였던 반면 더베와 루스드라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주민, 즉 루가오니아인들의 거주지였다(행 14:11). 더베 성에 관한 특수한 역사는 거의 알려진 바 없으나, 소아시아의 헬레니즘 침투의 시대에 더베는 다소 희랍화 되었음에 틀림없다. BC 1세기에 이 도시는 루스드라와 라란다를 포함하였던 작은 나라를 다스렸던 우두머리 안티파텔의 거주지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으나, 사람들은 안티파텔을 산적이라고 언급한다(Strabo, XI. 535). 안티파텔은 갈라디아의 왕 아륀타스에게 패하여 그의 영토에서 쫓겨났는데 BC 25년에 아뮌타스가 죽은 후 더베의 정치적 지배권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처음에 이 도시는 로마의 속주인 갈라디아 주에 속하였다. 그러나 AD 1세기에 더베는 일시적으로 콤마게네의 안티오쿠스 4세가 다스린 길리기아 왕국에 속하였는데 안티오쿠스 4세는 이 도시에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기념하여 별칭을 붙여주었던 것 같다. 2세기의 동전들에서 이 도시의 이름은 Clau(dia) Derb(e) (또는 Claudioderbe)로 나타난다. 더베의 정확한 위치는 오랫동안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이 위치는 지금 라란다, 즉 현재의 카라만(karaman)에서 동북쪽으로 24km 떨어진 케르티 훼육(Kerti Huyuk)이라고 밝혀졌다. 케르티 훼육에서 더베 시의회와 시민들이 AD157년에 안토니우스 피우스를 기리어 헌정한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지는 철기시대에 거주되었으며 헬레니즘시대와 로마시대 동안에 거주되었다. 그러나 중세시대에는 전적으로 포기되어 잊혀 졌음이 분명하다.
(3) 성경본문
(행 14:20) 제자들이 둘어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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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실신하였다가 다시 깨어나 그 다음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였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그의 서신 디모데후서 3:11에서 “내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고 하였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등지에서 받은 핍박의 결과이다(고후 12:7).
더베 전경과 유물들-1
더베 전경과 유물들-2
더베 전경과 유물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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