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살라미
(1) 지명 연구
살라미(Salamiv" : sal-am-ece' : 살라미스)는 평화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샬롬’에서 온 듯하다. 이 이름은 여러 가지 철자로 표시되고 있다. 기독교와 비잔틴의 작가들은 보통 Salamivνη (살라미네)로 언급한다. 인정된 그 철자법은 호메르스의
(2) 역사적 배경
살라미는 구브로의 주요 성읍으로서 시리아 맞은편 동부 연안의 낮은 만에 위치하고 있다. BC 6세기로부터 그 도시는 일련의 그리스 통치자들에 의해서 처리되었으며, 아마도 히람 3세 (Σίρωμος)의 치하에서 한동안 페니키아의 통치에 간섭을 받았던 것 같다. 이성읍은 페르시아인의 공격을 물리쳤던 에나고라스왕이 다스리던 BC 5세기가 전성기였다.
디아도키(Diadochi)시대에 이 성읍은 자치권을 읽었고, 이집트의 구브로 총독의 거주지가 되었다. 신약성서시대 로마의 통치하에서 살라미는 그 섬의 수도로서의 특권을 바보에게 빼앗겼다. 바울과 바나바가 방문했었던 이 유력한 유대 식민지는(행13:5) 로마시대 이전에 프톨레마이오스치하에서 분산이 행해지던 동안에 건립되었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전승에 따르면 바나바는 이곳에서 방문중인 시리아 유대인에게 선동된 유대인 폭도들에게 순교당했다.(반행22-23장). AD 116-17년에 걸쳐서 유대인 공동체는 이 섬에서 일어난 격렬한 폭동을 주도하였다. 그 결과 트라야누스에 의해서 이 성읍은 멸망되고, 그리스 주민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되었으며, 구브로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되었다.
(3) 성경 본문
(행 13:4~5)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 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
구브로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이집트와 소아시아의 중간에 위치하기 때문에 많은 배들이 왕래하는 지중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무역의 중심지였고, 구브로 섬에서 나는 은과 구리와 삼나무(선박의 재료)등을 수출하여 경제적으로도 번영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구브로에서 최초의 선교를 시작할 때도 이 섬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으며 로마 원로원에서 임명한 대리 총독 서기오 바울이 이곳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살면 지중해를 왕래하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수리아 안디옥에서 큰 도시 다소 등이 있는 북쪽으로 올라가서 전도하지 않고 오히려 실루기아로 내려와 구브로로 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구브로가 복음화 되면 여기서 세계 각처로 그 복음이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구브로 섬의 살라미에 도착하여 즉시로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이러한 전도 방식은 바울이 이미 다소 시절에 적용한 방법이었다. 유대인의 회당은 원칙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누구나 성경을 읽고 그것을 설교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4) 동역자 요한
전통적으로 제2복음서의 기자로 되어있다. `마가'라는 이름은 신약성경에 모두 9번 나온다. 즉, 사도행전 12:12, 25, 13:5, 13, 15:37, 골로새서 4:10, 디모데후서 4:11, 빌레몬서 1:24,베드로전서 5:13이다. 사도행전 13:5, 13에서는 단순히 `요한'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상의 기사에 의하면, 마가는 유대인 크리스챤인데, 히브리의 본명을 `요한( jIwavnnh" ,@n:h;ly)'이라 하고, 로마식 이름은 `마가(Marcus)'였다. 아버지에 대한 기사는 없으나,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 그의 집은 예루살렘에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집합소였다.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을 만한 가정을 가지고 있었고, 비자를 두고 있던 것 등으로 미루어 보아 꽤 넉넉한 살림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행 12:12,13). 바나바의 생질이었다는 점에서 마가는 지중해의 구브로 섬 출신의 레위 족인 것으로 생각된다(골 4:10,행 15:37,39). 마가가 만일 마가복음 14:51(다른 복음서에는 없다)의 청년이었다면, 생전에 주님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떤 학자가 마가를 주님의 직제자(直弟子)가 아니라고 한 것처럼, 당시의 그는 연소하여 제자의 수에 들지 못했을 런지도 모른다. 그가 전도에 관계한 최초의 기사는 첫 오순절로부터 6년 후 바나바와 바울과 같이 안디옥 교회에간 일이다(행 12:25). 그리하여 거기서 그들의 제 1차 전도여행에 `수종자'로서 동행하였다(행 13:5). 이 `수종자'란 전도의 보조자라기보다는 서무 방면, 즉 숙박˙여정(旅程)˙짐˙기타 시중드는 일이었던 것 같다. 혹은 수세(水洗) 따위를 도왔는지도 모른다. 그가 구브로를 거쳐 밤빌리아의 버가까지 동행했으나, 거기서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행 13:13). 그가 떠난 이유는 공포에 질려서인지, 곤란을 극복할 수 없었음이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급진적 이방 전도를 찬성할 수 없었음인지, 분명치 않다. 람제이 교수는 바울 일행이 출발 당시의 계획을 변경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하튼 그 자신의 형편에 의해서였음은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에 그의 동반을 거부하여 그 때문에 친구였던 바나바와 바울이 결별(訣別)하기에까지 이르른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행 15:38). 이때 그는 바나바를 따라 구브로에 건너갔으나, 그 후 여러 해 동안 그의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다.그 다음으로 그의 이름을 보게 되는 것은 바울의 서신에서인데, 그로부터 2년 후의 일이다. 그가 바울과 더불어 로마에서 영어(囹圄)의 생활을 하면서 그를 섬긴 것을 본다. 그리하여 바울은 그를 골로새 교회에 추천하여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라고 말하고, 또 `동역자' `나의 위로'라고도 불렀다(골 4:10,11,몬 1:24). 그 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라고 명령하고 있다. 전에는 걸림돌이나 방해거리 취급을 당한 그가, 이제 이렇게도 없어서는 안 될 마가의 다락방존재로 된 것이다. 아마도 바나바의 관용과 친절한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혹은, 일찍부터 회개하고 실패를 보충할 기회를 대망하고 있었을 런지도 모른다. 그 후(아마 바울의 사후) 그는 베드로를 도와 일했다(벧전 5:13). 여기서 베드로는 그를 `내 아들 마가'라고 부르고 있다(벧전 5:13). 즉, 그들 사이에 친밀함을 엿볼 수 있다. 천사에 의해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企待)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깨달은 베드로가 마가의 어머니의 집에 간 것으로부터도(행 12:12)그가 베드로와 친한 사이였음은 충분히 상상되고도 남음이 있다. 예수가 붙잡혔을 때,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자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친 청년이(막 14:51,52) 마가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마가는 로마에서 전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확실한 전설(Papisa)은, 그가 베드로의 통역을 했다고 한다. 베드로도 헬라어를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으나, 로마에서의 설교는 통역을 세워야 했던 모양이다. 브루기아의 히에라볼리의 감독 파피아스는 권위 있는 `장로'의 말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AD 140년 경). "베드로의 통역자가 된 마가는, 주님이 이야기하고 행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는 한, 순서는 바르지 않지만, 정확히 기록했다. 왜냐하면, 그가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도 아니고, 주를 수행한 것도 아니고, 앞서 말한 대로 후에 베드로를 따랐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필요에 따라 (그를) 가르쳤을 뿐, 주님의 어록(語錄)을 조직적으로 기술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마가는 기억하고 있던 것을 기록했으나, 조금도 틀리지는 않았다. 그에게서 들은 것을 빠뜨리거나 오전(誤傳)하지 않도록 전심했기 때문이다"(요세푸스 `교회사'). 이렇게 마가가 베드로의 설교를 편찬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다른데로 부터도 자료를 보충하여 저술한 `마가복음'이다. 교회에 있어서의 그의 직위는 제2류의 것이었으나, 최초의 예수 전도자로서의 그의 공헌은 귀중하다. 그의 만년과 죽음에 대한 소식은 분명치 않고, 여러 가지 전설만이 있다. 그 중 하나는, 그가 손가락 불구자였다고 하는 로마의 힛포리다스(3세기 초엽)의 전설인데, 실제로 불구였는지, 비유적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또 애굽의 전설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했다고 하는데(바나바 행전, 마가 행전 등 4, 5세기의 것) 근거가 박약하다. 애굽 전도에 대해서는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교부 글레멘드, 오리겐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13세기 비잔티운 교회터로 추정 발굴중
살라미 고대신전터 (1)
살라미 고대신전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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