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사귐에 힘쓰라..(요일1장1-10절)
예수님의 제자들의 가르침의 중심은 믿음과 구원에 관한 복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가르침에서 표현방식이나 강조하는 면들은 조금씩 특징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가르침과 서신서에서 유난히도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이 믿음을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방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에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율법을 행하여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음” 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대부분도 믿음이 강조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사도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그 믿음의 행위들을 강조하셨습니다.
믿는 자는 그 믿음의 행위를 통하여 그 믿음이 신실함을 증언하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사도요한의 서신의 가르침은 믿음을 넘어 또 다른 깨달음을 줍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을 뛰어넘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의 신학은 바울의 교리를 뛰어넘고 야고보의 신학을 넘어 더 깊은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봉독한 말씀처럼 사귐이라는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에 힘쓰라”고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생명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과의 사귐에 힘쓰시기를 축원합니다.
사귐이란 말씀은 koinwniva {koy-nohn-ee'-ah : 코이노니아} 교제, 교통, 공동체, 공유, 사귐, 동료의식, 사회적으로 '상호교류를 의미합니다.
진정한 하나님과의 사귐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그동안 믿음의 고백을 사도 신경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의 신앙 고백이고, 이를 믿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첫째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사귐입니다.
둘째 그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귐입니다.
셋째 성령을 믿고 사귐입니다.
넷째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사귐입니다.
다섯째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거룩과 사귐입니다.
여섯째 우리의 부활과 영생을 믿고 사명과의 사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참다운 사귐으로 인하여 흔들리지 아니하는 온전한 믿음으로 바로서시기를 축원합니다.
1. 생명의 말씀과 사귐에 힘쓰라.(1-2절)
[요일]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1: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생명의 말씀과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과 사귐은 하늘의 비밀을 아는 자입니다.
거룩한 성도는 세상의 사람들과의 교제 방법과 대상이 다른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은 원어적으로 lovgou th'" zwh'" (로고스 호 조예) '생명'(문자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살아 있는 상태.
본질적으로 "말씀"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생명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택함을 받은 우리 성도들에게 생명의 말씀과의 관계를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말씀을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최우선이고 당연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원하는 바로는 뭔가 불만족스럼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속성에 대하여 자연 계시와 특별계시함으로 보여주시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지었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참다운 사귐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래 에덴동산에는 원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친밀한 사귐이 있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거니시다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창]3: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 말씀은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장면이지만, 내용으로 보면 평소에 하나님과 아담 그리고 하와 사이에는 친밀한 사귐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그렇습니다 ....사탄마귀의 휴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은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사귐을 방해하였습니다.
사탄마귀의 휴혹에 넘어간 인간의 욕심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방해하게 된 것입니다.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아버지께로 오지 않은 것들을 좋아함으로 하나님과의 사귐이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이 사귐을 회복해야 합니다.
2) 우리의 사귐은 누림을 위함이라고 하십니다.(3-4절)
[요일]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단순히 법적인 자녀 됨을 상징하는 칭의의 단계를 넘어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리는 실제적인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도 이를 잘 지적했습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단계에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귐의 단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누림은 우리들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일]1: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성경의 말씀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님과 잘 사귐이 있으면....
믿음의 선친과, 믿음의 인도자와 성도들과 잘 사귐이 있으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 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회복된 모습을 이사야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사]62:4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택한자들에게 친근함으로 사랑으로 찾아오시어 헵시바라 쁄라라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너를 헵시바(오직 너를 내가 기뻐하는 자라..)
내 쁄라( 내 너의 주인이 되어줄께.......너는 내 여자야... 결혼하자)
너는 네 기뻐하는 자야... 너는 내 여자라... 나와 결혼하지.....하시며 다가오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빛 가운데 행하는 사귐에 힘쓰라(5-7절)
[요일]1:5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요일]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하나님과의 사귐은 하나님이 빛이시라는 뜻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fw'" {foce : 프호스} 빛, 불빛, 별빛, 등빛, '반짝이는 빛에 의해 드러나게 하다
은유. 하나님의 빛, 진리의 빛, 마음의 빛을 말합니다.
부정이든, 긍정이든, 선이든 악이든, 그의 모습들을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참다운 사귐은 신령과 진정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시므로 하나님과의 사귐은 빛 안에서 가능합니다.
진정한 사귐은 모든 면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과의 사귐이 이러해야 합니다.
세상의 영광과 쾌락을 포기하더라도 빛이신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을 얻어야 합니다.
[요]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나는 어두움에 있지는 않으신가요?
나는 생명의 빛을 따르고 있는가요?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심이 생명의 빛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충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말세에는 빛과의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롬]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어두움을 버리고 빛과의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는 성도는 빛을 나누어야 합니다.
[계]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빛으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 빛으로 죄를 사하시었고, 그 빛으로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3. 회개하여 거룩과 사귐에 힘쓰라(8-10).
[요일]1:7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은 죄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합니다.
죄의 용서의 차원을 넘어 죄를 떠나야 합니다.
빛이신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는 성도는 어두움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본문에 사용된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kaqarivzw {kath-ar-id'-zo : 카다리조} 깨끗케 하다,
(율법적 의미)깨끗하다고 선언하다
여기서 “죄에서 깨끗하게 하심”은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분리를 말합니다.
은 속죄와 죄로부터의 분리를 모두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회개하고 용서받고 마음에 평안을 얻는 것이 신앙이 전부가 아닙니다.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으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눅]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하나님과의 사귐은 아브라함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 됨으로 만족하지 말고 빛을 나누고 죄로부터 분리되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집을 떠났던 탕자가 돌아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탕자는 집으로 돌아오며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하나로 받아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품꾼이 아니라 아들로 맞아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아들에게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이 회복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단순한 받아들임이 아니라 자격과 권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종을 분리시키고....... 아들로 삼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귐에 대하여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사귐안에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 사귐은 성도와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말씀과 유사합니다.
이 사귐은 교제(코이오니아)와 함께 무조건적인 나누는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교제와 사귐에 대하여 그릇된 유물론적 윤리사상에 사로잡힌 공산주의자들은 부자의 것을 빼앗고 도적질하고 하여서라도 나눔과 사귐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 기업을 무너트리고, 중소기업이 많아져야 한다느니.....
대 기업에서 세금을 무겁게 거두어서 모든이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야 한다든지...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것까지도 죄가 아닌 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소위 상황 윤리라고 해서 죄를 범하고도 그것을 합리화하여 죄가 죄 아닌 것으로 생각하려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진정한 사귐과 나눔은 사랑으로 자원함으로 온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참다운 사귐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요일]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참 사귐은 거짓없는 진실한 마음의 깊은데서 나옵니다.
그 참다운 사귐이 무었입니까?
하나님과의 참다운 사귐은 하나님과의 신령과 진정으로의 사귐이요,
그 참다운 사귐은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하나님 사랑 안에서의 누림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이미 받았고 받고 있으며 미래에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참다운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눅]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말세에 사는 우리 신앙 가운데에서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 가를 점검하여 볼 때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사귐은 빠를수록 좋습니다........늦으면 후회 합니다.........
더 늦으면 영원히 기회를 잃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달한다면 오늘부터 하나님과의 사귐에 힘쓰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사귐은 먼저는 하나님과 교회공동체의 하나님의 자녀들과 아름다운 사귐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과 사귐에 힘쓰라..(요일1장1-10절)
1. 생명의 말씀과 사귐에 힘쓰라.(1-4절)
2. 빛 가운데 서로 사귐에 힘쓰라(5-7절)
3. 회개하여 거룩과 사귐에 힘쓰라(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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