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지명해설

  • 자료실 >
  • 성경지명해설
2.2.17. 예루살렘 4차 방문
박진숙 2017-05-11 추천 0 댓글 0 조회 382

17) 예루살렘 4차 방문

 

  (1) 지명 연구

    예루살렘(@Ierosovluma : hee-er-os-ol'-oo-mah : 히에로솔뤼마)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는 마소라(Masorah) 독법(讀澤)으로 yerusalayim, 70인역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jIerousalhvm은 아랍어의 발음에 의한 것이다. 그 의미는 `샬렘의 기초'이며, 예루살렘은 옛날 샬렘(Shalem) 예배의 중심지였다. 전통적으로는, `평화의 소유' 혹은 `평화의 기초'로 해석되고 있다. 이 도시의 다른 호칭으로서는 `살렘'(Salem, 76:2), `모리아'(Moriah, 22:2), `여부스'(Jebus, 18:28), `시온'(Zion, 왕하 19:21), `다윗 성'(the city of David, 삼하 5:7), `아리엘'(Ariel, 29:1), `거룩한 성'(the holy city, 4:5) 등이 있다. 고대 도시의 지지(地誌) 문제는 그 기록이 근소한 것, 멸망과 재건이 반복되었다는 사실, 비문의 결여, 유대인, 그리스도인, 마호멧교도 등의 그릇된 전설 등에 의해 몹시 착종(錯綜)되어 있다.   

 

  (2) 역사적 배경

 

   예루살렘은 상업적·정치적으로 나라의 중심지로 되어 있다. 북쪽의 세겜과 남쪽의 헤브론을 잇는 간선 도로의 중간에 있고, 또는 동쪽의 여리고, 요단 계곡에서 올라오는 길과 서쪽의 지중해 방면에서 들어오는 길이 예루살렘에서 교차한다. 성읍은 유대 고원과 접하고 있는 북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골짜기로 둘러싸여 있다.

   창세기 14장의 살렘은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재차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는 것은 아들 이삭을 바치는 때이다(22:1-19). 그 장소는 `모리아의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땅은 `모리아 산'이라 불리 우고 있다(대하 3:1).

   예루살렘은 BC 1000년경 다윗에게 점령되었다. 이곳을 왕국 수도로 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극히 중요한 것이었다. 이 성읍이 어느 지파에게도 속하여 있지 않았음으로 왕국 통일을 위해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은 또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궤'를 모셔다가 장막을 쳤다.

   솔로몬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성전 건축이다. 성전 건축은 성벽의 확장을 필요로 하고 성벽은 다윗 성의 동북 모퉁이에서 기드론 골짜기의 위를 북쪽으로 뻗혔다.

   아마샤 때에 예루살렘시의 성벽은 거의 완성되어 서남구릉도 둘려 쌓여 있었다(왕하 14:11-14).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는 별명을 웃시야라 했고, 그는 예루살렘의 방비를 강화했다(대하 26:9).

   여호아하스의 단기간의 통치 다음 여호야김이 애굽의 앞잡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바벨론에 굴복하도록 강요당하였으나 곧 반역하였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포위되어 항복하기에 이르게 되나 그는 그 전에 죽었다.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은 즉위 후 3개월 만에 많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같이 사로 잡혀 바벨론으로 이송되었다(왕하 23:36-24:16). 시드기야는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올라 11년간 통치한 다음 바벨론에 반역하여 BC 587년 멸망의 재난을 그의 수도와 왕국에 불러 들였다(왕하 24:17-20). 이 비극 시대에 예레미야는 예언하고, 예루살렘에 대하여 수 없이 언급하고 있다.

   바사 왕 고레스의 명에 따라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이 대제사장 예수아와 같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다(대하 36:22-23,1:1-4,8). 그러나 예루살렘 성읍 그 자체의 재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4:6-23).

   에스라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 II(BC 405- 358)의 제 7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7:1-10).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I(BC 444)의 제 20년에 성벽 재건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제 1차로 귀환하였다(1:3,2:1-8).

   A.D. 37, 이두매 출신 헤롯이 로마 황제의 총애를 받아 유대 왕이 되었다. 헤롯은 비록 유대인 행세를 했으나 부계와 모계 모두 에돔의 혈통이었으며, 정치적 목적으로 하스몬 왕가의 공주 마리암과 재혼을 하였다. 그리스-로마 문화의 예찬자였던 헤롯 대왕은 거대한 성전과 왕궁, 원형경기장, 목욕탕, 도로, 광장과 요새들을 지어 위대한 건축자로서의 명성을 날렸다.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제 2성전을 재건하고 부속 건물과 주변의 요새들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헤롯은 스룹바벨이 지은 제2성전을 부수지 않고 희생 제사나 제물 봉헌도 중단시키지 않으면서 새로운 성전을 만들었다. 성전 건물 자체는 1년 반 정도 걸려 완성되었다. 요한복음 220절에 의하면 성전은 46년이나 걸려서 완성되었다고 하지만 예수님 활동 당시에는 성전이 완성되지 않았었다(12:2). 예루살렘 성전은 A.D. 64년 헤롯 아그립바 2세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예수께서 재판 받은 곳의 박석(19:13) 45m 이상의 방형이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곳, `해골'(아람어로 골고다)은 확실히 그 당시는 성읍 밖에 있었다. 요한복음 19:20에 그것은 성에서 가까운 곳이라고 했다. 히브리서 13:12은 그 곳을 `성문 밖'이라고 했다. 예수의 승천 장소는 감람산이다(1:12).   

 

  (3) 성경 본문

 

 

 (18:22)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바울은 에베소에서 지중해 연안 항구도시 가이사랴까지는 약800km의 항해거리이다. 바울은 소아시아의 에베소를 떠나서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잠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교회에 안부를 전하고 다시 육로로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3차 예루살렘 방문 후 3년 후이었다.

 

 

바울의 예루살렘 행로 

 

예루살렘 항공사진 

 

히스기야 터널(기혼샘에서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드리는 터널) 

자유게시판 목록
구분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2.2.18. 수리아 안디옥 박진숙 2017.05.11 0 436
다음글 2.2.16. 에베소 박진숙 2017.03.22 0 847

573874 TEL : 063-464-8186 지도보기

Copyright © 울타리교회. All Rights reserved. MADE BY ONMAM.COM

  • Today4
  • Total71,503
  •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