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더베와 루스드라 <1차 전도여행 지역>
(1) 지명 연구
① 더베 (der-bay')
더베(der-bay' : 델베)이다. 소나무의 한 종류인 ‘더베 나무’에서 비롯되었다. BC 25년 갈라디아 왕 아뮨다스의 사후 로마 영으로 되었고, AD 41년 글라우디오 더베(Claudio Derbe)라는 명칭을 얻었다. 현재 지명은 케르티 훼육(Kerti Höyük)이다.
② 루스드라 (Luvstra)
루스드라(Luvstra : loos'-trah : 뤼스트라)는 ‘양의 무리’라는 뜻의 단순한 지명이다. 현재 지명은 하툰사라이(Hatunsaray)라 불리는 옛 터가 남아 있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2) 역사적 배경
①더베
더베는 남부 아나톨리아의 중부지역에 있는 한 고원지대인 루가오니아라는 지방의 한 도시인데 이 지바의 중심도시는 이고니온이다. 하지만 이고니온은 브루기아인들이 거주한 중심지였던 반면 더베와 루스드라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주민, 즉 루가오니아인들의 거주지였다(행 14:11). 더베 성에 관한 특수한 역사는 거의 알려진 바 없으나, 소아시아의 헬레니즘 침투의 시대에 더베는 다소 희랍화 되었음에 틀림없다. BC 1세기에 이 도시는 루스드라와 라란다를 포함하였던 작은 나라를 다스렸던 우두머리 안티파텔의 거주지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으나, 사람들은 안티파텔을 산적이라고 언급한다(Strabo, XI. 535). 안티파텔은 갈라디아의 왕 아륀타스에게 패하여 그의 영토에서 쫓겨났는데 BC 25년에 아뮌타스가 죽은 후 더베의 정치적 지배권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처음에 이 도시는 로마의 속주인 갈라디아 주에 속하였다. 그러나 AD 1세기에 더베는 일시적으로 콤마게네의 안티오쿠스 4세가 다스린 길리기아 왕국에 속하였는데 안티오쿠스 4세는 이 도시에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를 기념하여 별칭을 붙여주었던 것 같다. 2세기의 동전들에서 이 도시의 이름은 Clau(dia) Derb(e) (또는 Claudioderbe)로 나타난다. 더베의 정확한 위치는 오랫동안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이 위치는 지금 라란다, 즉 현재의 카라만(karaman)에서 동북쪽으로 24km 떨어진 케르티 훼육(Kerti Huyuk)이라고 밝혀졌다. 케르티 훼육에서 더베 시의회와 시민들이 AD157년에 안토니우스 피우스를 기리어 헌정한 비문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지는 철기시대에 거주되었으며 헬레니즘시대와 로마시대 동안에 거주되었다. 그러나 중세시대에는 전적으로 포기되어 잊혀 졌음이 분명하다.
② 루스드라.
루스드라는 더베와 더불어 루가오니아의 중요 도시였다. 루가오니아는 동쪽으로 가바도기아, 북쪽으로는 갈라디아, 남쪽으로는 길리기아, 서쪽으로는 비시디아와 부르기아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루가오니아 사람들은 거칠고 호전적이어서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쳤다. 그러나 헬라의 강력한 군사력 앞에서는 무너져 이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B.C. 190년까지), 로마시대에는 버가모 왕에게 하사하여 다스리도록 했으나 실질적인 지배는 여전히 로마인의 손에 있었다. 이후 북부지방은 갈라디아에 동부지방은 가바도기아에 남부지방은 길리기아에 분할되어졌고, 사도시대에는 갈라디아의 속주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루가오니아 언어는 사라지지 않고 존속했으며 사도행전 14장 8-11절에는 바울이 다리 불구자를 고쳤을 때에도 루가오니아 방언이 아직도 사용되어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루가오니아어는 6세기까지 남아있었다.
이고니온(콘야)에서 남쪽으로 32km 떨어진 루스드라의 위치는 1885년에 발견된 비석에 의하여 명확하게 밝혀졌다. 이 비문에 의하여 루스드라는 하툰사라이 (Hatunsaray 숙녀의 저택)의 북쪽 언덕임이 증명되었다. 졸더라(Zoldera) 혹은 조르둘라 휘윅(Zordulahuyuk)으로 알려진 이 언덕은 B.C. 3000년 – 2000년부터 형성된 텔(Tell)이지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 시대였으며 루스드라는 이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직 발굴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표면에 흩어진 몇 개의 잔해로는 고대 건물이 있었음을 확신하지 못한다. 루스드라는 비옥했다. 하툰사라이 남쪽과 북쪽으로 흐르는 강은 충분한 물을 공급하였고, 이것이 이 지역을 농업의 발전지역이 되게 하였다. 상업적인 특성은 없지만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에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루스드라 남쪽 지역에 사는 로마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루스드라에 군대를 배치하기도 했다. 이때 이 지역에 화폐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황제는 비시디아 지역에 비아 세바스테(Via Sebaste)도로를 개설하였고, 이고니온에 연결되고 이어서 루스드라와 더베, 길리기아까지 확장되었다. 이 도로는 바울이 더베에서 이고니온까지 갈 때, 그리고 두 번째로 루스드라와 더베를 방문할 때 이용했다. 복음은 식민지를 로마화하기 위한 도로를 따라서 전파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로마의 세계 지배를 위한 도로 개설은 복음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볼수 있다. 임영재, op. cit., p.174.
(3) 성경 본문
(행 16:1~5)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
바울과 실라가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제2차 선교여정을 떠나 더베를 지나 루스드라에 이르렀을 때, 디모데도 선교여정에 동참하기를 원하였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지방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청년이었다(행 16:2).
바울의 제1차 선교여정과 제2차 선교여정 사이에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다. 이 공의회에서는 할례 문제가 쟁점이었다. 드디어 예루살렘 공의회는 4대 결의문을 결의하고 안디옥·시리아·길리기아·소아시아 등지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공문서를 보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소아시아 여러 성들을 다니며 전도하였다. 누가는 바울이 제1차전도 여행 때 방문한 교회들을 다시 방문한 사실을 간단히 기록하고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행 16:5)라는 일반적인 진술을 하므로 그 당시의 교회의 형편을 전하고 있다.
(4) 동역자 : 디모데
디모데의 고향이 더베인지, 루스드라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부친은 헬라인이고, 모친은 유니게라는 기독교로 개종한 경건한 유대인이었다. 외조모 로이스도 그 집에 동거하여 그는 신앙이 돈독한 가정에서 자랐다(행 16:1,20:4,딤후 1:5). 디모데도 훌륭한 인물들의 예에 빠지지 않게 모친의 좋은 감화를 많이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구약성경을 토대로 신앙을 키웠으며, 사도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 갔을 적에 디모데의 모친과 외조모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 되었는데, 디모데도 그때 주를 영접하고 새로운 신앙을 이행할 수 있는 연령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도 회심했을 것이다(행 14:6,22,고전 4:14-17, 딤후 1:5,3:11).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가까이 하였으나(딤후 3:15), 할례는 받지 않았다(행 16:3). 청년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칭찬받는 자가 되었다(행 16:2).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AD 50년 경)에서 다시 남갈라디아 여러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는 디모데와 친교하면서 그의 사람 됨됨을 확인하고 전도여행의 동반자로 하려고 했다. 즉, 바울은 그때 디모데가 그 지방에서 좋은 본을 보이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행 16:2). 사도행전 16:3에 디모데가 직접 전도 사업에 동참하여 일할 때, 유대인의 반감을 살 것을 염려하여 할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디모데는 특별한 봉사를 위해 택함을 받았다는 예언이 있었다(딤전 1:18,4:14). 그리하여 바울은 전도여행을 출발하기에 앞서 장로들과 더불어 안수하고, 그를 그 때문에 성별했다(딤전 4:14, 딤후 1:6). 그 후 그는 바울을 따라 갈라디아에서 드로아, 데살로니가, 베뢰아로 갔다. 디모데와 실라는 바울이 아덴에 갔을 때, 베뢰아에 머물러 있었다(행 17:14). 바울은 그들에게 속히 아덴으로 오도록 연락했다(행 17:15).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 3:1, 2에 의하면, 바울은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돌려보냈으므로, 실라와 디모데는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하기까지는 같이 있지 않은 것 같다(행 18:5, 살전 3:6). 이리하여 디모데는 바울과 더불어 고린도에 체재하였다(살전 1:1,살후1:1). 다음에 그의 이름을 보는 것은 바울의 에베소 전도에서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17에서 "이 편지를 쓰기 전에 고린도에서 볼 수 있는 악폐(惡幣)를 고치기 위해 디모데를 거기 보냈다"고 쓰고 있다. 그렇지만, 고린도전서 16:10에 암시되어 있는 것처럼 어떤 이유에서인지 디모데는 고린도에 가지 않은 것 같다. 여하튼 그는 에베소에 돌아온 듯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기 직전 디모데와 에라스도는 먼저 마게도냐에 가서(행 19:22) 거기서 바울은 곧 디모데와 합류했기 때문이다(고후 1:1). 이리하여 그들은 같이 고린도로 갔다(롬 16:21). 또 디모데는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의 동행자의 한 사람이었다(행 20:4).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까지 갔는지 어떤지는 불명하다. 바울이 가이사랴의 옥중에 있을 때, 로마로 가는 항해에 그가 동행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로마에서 쓴 서신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빌 1:1,2:19-22,골 1:1,몬 1:1). 바울이 석방된 다음은 그전보다 더 중요한 책임을 디모데에게 맡긴 것 같다. 디모데전서를 보면, 디모데는 에베소에 있는 교회의 책임을 맡은 모양이다. 청년 디모데에게 그것은 곤란한 임무였다(딤전 4:12). 그는 거짓 교사들과 싸우며 임원을 임명하고 교회의 규칙을 제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울은 순교 직전 디모데에게 최후의 편지(디모데후서)를 썼다. 디모데는 바울의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고전 4:17) 또 `믿음 안에서 참 아들'(딤전 1:2)이었다. 그의 만년에 대해서는 분명치는 않으나, 전설에 의하면 에베소의 감독이었던 그는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Titus Flavius 51- 96)나 네르바(Nerva, Marcus Cocceius 30- 98)가 로마 황제 때에 순교했다는 것이다. 디모데에 대해서는 바울의 생애와 관련해서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나, 바울에게 있어서는 실로 좋은 동역자였으며, 위로자였다.
루스드라와 더베가 있는 남 갈라디아 광역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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