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리아 안디옥
(1) 지명 연구 : ‘Αντιοχεια (안티오케이아 Antionch), 안디옥 : 전차, 병거
안디옥은 전차 또는 병거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쟁이 많았던 시대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며 용맹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묘한 것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구원의 복음이 안디옥에서 성정한 후 탱크처럼 온 세상으로 진격하여 정복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안디옥을 택하시고 그곳을 복음의 전진기지로 삼아 복음을 확장시키신 것은 안디옥의 이름과도 일치합니다.
(2) 역사적 배경 (1차 전도여행 참조)
안디옥은 다른 안디옥이란 이름을 가진 도시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수리아 안디옥이라고 부른다. 현재 안타키야(Antakya)로 부르며 정식 명칭은 하타야(Hataya)이다.
안디옥은 B.C.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그의 부하였던 4대 장군들이 헬라제국을 4등분 하는 과정에서 시리아 일대를 차지한 셀레우코스 니카토르(Seleucos Nicator)가 그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B.C. 300년에 세운 도시로 자신의 아버지인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현재는 터키의 안타키아(Antakya)로서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3대 도시였다. 알렉산더 대제가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로 묶어 헬레니즘 문화를 창출한 도시였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B.C. 2세기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안디옥에 정착하여 A.D. 1세기에는 유대인의 수가 많이 증가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언어들도 상이하였다. 본토인들은 아나톨라어, 로마인들은 라틴어,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구스디아인들은 아프리카어 등 각기 자국어를 사용하면서도 헬라어를 공통으로 사용하였다. 안디옥은 수리아 지방의 로마 행정 수도가 되었고, 도시 근교에 헬라 여신 다프네 신전이 있었다. 예루살렘교회는 첫 순교자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한 후(행 7:59~60), 예루살렘에 핍박이 더욱 심하여(행 8:1) 그리스도인들은 지중해 연안 구브로 섬과 소아시아 여러 지방으로 흩어졌다. 바울은 이러한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의 대도시에 이방세계를 향한 선교본부를 정했다.
안디옥은 이집트의 람세스와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스 대왕간의 카데슈성을 놓고 자웅을 겨뤘던 오론테스 강상에 위치하고 있다. 오론테스 강은 지중해로 흘러드는데 해변의 강 하구에서 32km 거슬러 올라간 곳에 안디옥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오론테스강은 수량이 줄어들고 강바닥이 상승하면서 강으로서의 기능이 축소되었지만 당시에는 지중해에서 안디옥가지 32km나 강을 통해서 배가 왕래하였다. 그러므로 안디옥은 실루기아 지방의 중요한 항구로 자리를 잡았고, 동시에 육로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상업적인 거래가 활발하였다. 교역의 조건이 좋은 안디옥에는 마케도냐인, 헬라인, 시리아인, 유대인, 토착민 등이 섞여 살았다. 이런 다민족 체제는 다른 종교와 사상과 이론에 대한 수용성을 넓혔는데 현재도 이러한 특성은 살아 있어서 안디옥에 많은 외국인들이 살며 기독교인들도 약간은 활동의 자유로움이 있다. 이러한 특성은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흩어진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유대인이면서도 비유대적 교리의 가르침은 이곳 사람들을 매혹시켜 기독교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더욱이 헬라제국을 무너뜨린 로마제국이 B.C. 64년 시리아를 점령하면서 안디옥은 시리아 지역을 지배하는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로마의 동방정책의 중심지가 되었다. 때문에 도로건설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안디옥과 로마를 연결하는 가도가 형성되었으며 이 도로 상에서의 치안은 비교적 안정되어 인적 물적 자원의 이동이 활발하게 되었다. 더불어 안디옥에서 성장한 기독교가 세계로 뻗어 나아가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바울은 이 가도를 따라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다. 안디옥의 다민족 사회는 교회의 성장을 촉진시켰고, 이렇게 성장한 교회는 다시 로마의 잘 발달된 도로망을 따라 세계로 퍼졌다. 안디옥의 건설과 그에 따른 지리적, 상업적, 군사적 특성은 결국 복음의 전파 통로를 개설하는 것이었다.
(3) 성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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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의 문제로 바울과 헤어진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를 재차 방문했습니다. 구브로가 복음화 되는데 사탄의 역사가 강했으므로 두 사람의 분쟁은 필연적이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성령은 바나바를 구브로에 재차 파송하신 것입니다. 구브로가 바나바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구브로인의 구원에 대한 열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순교합니다. 구브로 섬은 소아시아지역과 더불어 기독교화 되었고 수백 개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바나바의 생명은 한 알의 죽은 밀알이 되어 백배의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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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실라는 A.D. 52년이나 51년 봄에 교회에 의해 보냄을 받았다. 바울은 제1차 선교여정 시에 다녀간 이 지역 교회들을(9:30; 11:25) 재차 방문하여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였다.
(4) 동역자들
① 실 라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한 사람이며, 사도 바울의 동역자이거나 아니면 친구이다. 그는 예루살렘 총회 결의 사항을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바울과 같이 공적으로 파견되었다(행 15:22,27,32). 할례 문제(구원) 때문에 예루살렘에 모였던 사도와, 장로들, 그리고 교회대표자들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야고보의 제안을 채택하여 각 교회에 통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다와 실라는 이 임무를 마치고 안디옥에 남아 전도하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바울은 제 2차 전도여행에 요한과 마가를 동반할 것을 거부하고 그 때문에 바나바와 작별하고 실라를 데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전도했다(행 15:40).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점하는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것이 화근이 되어 관가에 피소되었다. 그들은 이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 즉, 그들은,
㉠ 군중들의 난폭한 취급을 당했으며,
㉡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옷을 벗기 우고 구타를 당하였고,
㉢ 옥에 갇혀 잔인한 취급을 당하였다.
이 수난이 고린도후서 11:25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옥중에서 밤에 기도하고 찬송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지진의 위엄으로 그들을 구출하셨다. 간수는 이들이 탈옥한 줄 알고, 문책당하여 사형을 받느니보다는 자결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으나 바울과 실라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들은 도리어 간수를 도와 죽을 자리에서 살려 주었던 것이다. 간수가 그들 앞에 엎디어 구원 방법을 묻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그와 그의 집에 전도했다. 예수를 믿게 된 간수는 바울과 실라에게 친절한 대접을 했음으로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히는 수난을 겪기는 했으나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고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다(행 16:19-40).
다음에 그는 암비볼리와 아볼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도 바울을 따라 같이 전도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반면, 시기로 인하여 바울과 실라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소동까지 일으켰기 때문에 바울과 실라는 밤에 베뢰아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와서 무리를 충동하여 소동을 일으키자, 베뢰아 신자들은 유대인들의 박해가 미치기 전에 즉시 바울과 실라를 피신시켰다. 바울은 아덴으로 떠났고 실라와 디모데는 거기 체류하여 어린 교회를 돌보게 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즉시아덴의 바울에게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들은 곧 떠났으나 바울과 동행한 것은 바울의 고린도 도착 후인 것 같다(행 17:4,14,18:5). 고린도에서 실라는 바울의 유능한 동역자 였다(고후 1:19). 사도행전에서 `실라'로 불리운 그는 바울 서신에서는 `실루아노'로 불리 우고 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에서 바울과 디모데와 더불어 문안 인사를 보냈다. 한 마디로 실라는 바울의 신실한 형제로 알려진다(벧전 5:12). 그는 본래 예루살렘 교회의 요인으로서 예언자 중 하나였다(행 15:22,32).
수리아안디옥 베드로기념 동굴교회의 현재 모습
수리아안디옥 베드로기념 동굴교회의 내부전경
수리아안디옥 베드로기념 동굴교회로 들어가는 굴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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