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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 예루살렘 3차 방문
박진숙 2016-03-11 추천 1 댓글 0 조회 1926

11) 예루살렘 3차 방문

 

 

(1) 지명 연구

 

   예루살렘(@Ierosovluma : hee-er-os-ol'-oo-mah : 히에로솔뤼마)는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는 마소라(Masorah) 독법(讀澤)으로 yerusalayim, 70인역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jIerousalhvm은 아랍어의 발음에 의한 것이다. 그 의미는 `샬렘의 기초'이며, 예루살렘은 옛날 샬렘(Shalem) 예배의 중심지였다. 전통적으로는, `평화의 소유' 혹은 `평화의 기초'로 해석되고 있다. 이 도시의 다른 호칭으로서는 `살렘'(Salem, 76:2), `모리아'(Moriah, 22:2), `여부스'(Jebus, 18:28), `시온'(Zion, 왕하 19:21), `다윗 성'(the city of David, 삼하 5:7), `아리엘'(Ariel, 29:1), `거룩한 성'(the holy city, 4:5) 등이 있다. 고대 도시의 지지(地誌) 문제는 그 기록이 근소한 것, 멸망과 재건이 반복되었다는 사실, 비문의 결여, 유대인, 그리스도인, 마호멧교도 등의 그릇된 전설 등에 의해 몹시 착종(錯綜)되어 있다.

 

 

(2) 역사적 배경

 

   예루살렘은 상업적·정치적으로 나라의 중심지로 되어 있다. 북쪽의 세겜과 남쪽의 헤브론을 잇는 간선 도로의 중간에 있고, 또는 동쪽의 여리고, 요단 계곡에서 올라오는 길과 서쪽의 지중해 방면에서 들어오는 길이 예루살렘에서 교차한다. 성읍은 유대 고원과 접하고 있는 북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골짜기로 둘러싸여 있다.

   창세기 14장의 살렘은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재차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는 것은 아들 이삭을 바치는 때이다(22:1-19). 그 장소는 `모리아의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땅은 `모리아 산'이라 불리 우고 있다(대하 3:1).

   예루살렘은 BC 1000년경 다윗에게 점령되었다. 이곳을 왕국 수도로 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극히 중요한 것이었다. 이 성읍이 어느 지파에게도 속하여 있지 않았음으로 왕국 통일을 위해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은 또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궤'를 모셔다가 장막을 쳤다.

   솔로몬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성전 건축이다. 성전 건축은 성벽의 확장을 필요로 하고 성벽은 다윗 성의 동북 모퉁이에서 기드론 골짜기의 위를 북쪽으로 뻗혔다.

   아마샤 때에 예루살렘시의 성벽은 거의 완성되어 서남구릉도 둘려 쌓여 있었다(왕하 14:11-14).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는 별명을 웃시야라 했고, 그는 예루살렘의 방비를 강화했다(대하 26:9).

   여호아하스의 단기간의 통치 다음 여호야김이 애굽의 앞잡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바벨론에 굴복하도록 강요당하였으나 곧 반역하였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포위되어 항복하기에 이르게 되나 그는 그 전에 죽었다. 여호야김의 아들 여호야긴은 즉위 후 3개월 만에 많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같이 사로 잡혀 바벨론으로 이송되었다(왕하 23:36-24:16). 시드기야는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올라 11년간 통치한 다음 바벨론에 반역하여 BC 587년 멸망의 재난을 그의 수도와 왕국에 불러 들였다(왕하 24:17-20). 이 비극 시대에 예레미야는 예언하고, 예루살렘에 대하여 수 없이 언급하고 있다.

   바사 왕 고레스의 명에 따라 세스바살과 스룹바벨이 대제사장 예수아와 같이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다(대하 36:22-23,1:1-4,8). 그러나 예루살렘 성읍 그 자체의 재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4:6-23).

   에스라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 II(BC 405- 358)의 제 7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7:1-10).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I(BC 444)의 제 20년에 성벽 재건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제 1차로 귀환하였다(1:3,2:1-8).

   A.D. 37, 이두매 출신 헤롯이 로마 황제의 총애를 받아 유대 왕이 되었다. 헤롯은 비록 유대인 행세를 했으나 부계와 모계 모두 에돔의 혈통이었으며, 정치적 목적으로 하스몬 왕가의 공주 마리암과 재혼을 하였다. 그리스-로마 문화의 예찬자였던 헤롯 대왕은 거대한 성전과 왕궁, 원형경기장, 목욕탕, 도로, 광장과 요새들을 지어 위대한 건축자로서의 명성을 날렸다.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제 2성전을 재건하고 부속 건물과 주변의 요새들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헤롯은 스룹바벨이 지은 제2성전을 부수지 않고 희생 제사나 제물 봉헌도 중단시키지 않으면서 새로운 성전을 만들었다. 성전 건물 자체는 1년 반 정도 걸려 완성되었다. 요한복음 220절에 의하면 성전은 46년이나 걸려서 완성되었다고 하지만 예수님 활동 당시에는 성전이 완성되지 않았었다(12:2). 예루살렘 성전은 A.D. 64년 헤롯 아그립바 2세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예수께서 재판 받은 곳의 박석(19:13) 45m 이상의 방형이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곳, `해골'(아람어로 골고다)은 확실히 그 당시는 성읍 밖에 있었다. 요한복음 19:20에 그것은 성에서 가까운 곳이라고 했다. 히브리서 13:12은 그 곳을 `성문 밖'이라고 했다. 예수의 승천 장소는 감람산이다(1:12).

 

 

(3) 성경 본문

 

(15:1-2)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바울이 안디옥교회로 복귀하여 제자들과 함께 오래있었던 기간 중에, 초대교회 내부에 잠복해 있던 사활적인 논쟁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었다. 초대교회 안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차별 없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칭의 복음을 주장하는 복음주의자들과, 주를 믿는 것 외에 이방인까지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바울과 바나바가 유대에서 내려온 사람들과 사이에 할례 문제로 큰 논쟁이 벌어졌다. 유대에서 내려온 사람들 곧 할례당들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다른 몇 사람을 증인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냈다(15:2).

   복음과 율법의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예루살렘 공교회의 최후의 결정울 요구하게 된 것이다.

 

(15: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A.D. 48년경 예루살렘 공의회(The Cluncil of Jerusalem)가 열리고 많은 변론이 있은 후(15:7) 베드로가 외치기를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율법, 5:1; 11:28-29)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 믿노라”(15:10-11)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할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득의 진리를 밝혔다.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할례를 받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 외에도 우상의 제물과 목메어 죽인 것과 피를 먹지 말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경의하고 그 결의를 온 교회에 보내기로 하였다(15:20).

   결정문은 율법주의와 복음주의의 타협안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울의 이신칭의복음이 공교회의 근본교리로 확정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4) 동역자 디도

 

 (2:1~3)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디도는 바울의 신임이 두터운 동조자(同調者)이며, 그의 긴 전도여행의 동행자로서, 그의 일을 잘 도왔다. 그런데도 디도의 전기적(傳記的) 기사는 극히 적고 바울의 서신에 겨우 13번 정도 그의 이름이 나타날 뿐이다. 사도행전에서는 이상하게도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조차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나오는 디도 유스도가 혹시 디도가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는데, 이것은 동의할 수 없다. 갈라디아서 2:3에 의해 그가 `할례 받지 않은 헬라인'이라는 것은 분명하나, 그의 출생지와 국적은 불명하다. 디도가 바울의 전도를 받고 개종한 것은 사도행전 15장과 갈라디아서 2:1-10에 있는 제 1회 예루살렘회의(49- 50년 경) 이전으로써, 디도는 안디옥 교회를 대표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더불어 이 회의에 참석했다(15:2,2:1). 이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아마 안디옥에서 출생하여 거기서 바울에 의해 구원으로 인도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울이 `나의 참 아들'(1:4)이라고 부른 것으로서도 알 수 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그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라는 탓으로 유대주의자 사이에 문제가 되었다. 이 일은 이 회의의 중심 문제와 관계가 있었으나, 유리하게 해결되었으므로 교회는 그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방인의 할례 문제를 논박하기 위해 좋은 논증을 주기 위해 디도를 동반했는지도 모른다.

   갈라디아서를 썼을 때, 즉 제2차 전도여행 마지막 무렵에(AD 52년 경) 안디옥에 바울이 있을 때 디도도 같이 있었던 것 같다(2:3). 그 후 바울과 더불어 제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 체류하던 마지막 무렵(AD 56년경), 그 후에 중대한 사명을 띠고 고린도 교회에 갔다(고후 2:13,7:6,13,8:6,16,12:18). 고린도전후서는 다 디도가 사자로서 고린도 교회에 전한 것 같다. 고린도후서에는 그의 이름이 9번 나온다. 디도가 파견되어 있는 동안, 디도에 의한 고린도교회의 사정에 대한 보고를 바울은 얼마나 학수고대 했는지 모른다. 그는 디도가 돌아올 때까지 불안에 차 있었던 것 같다(고후 2:13). 디도를 만나 보고를 들었을 때, 바울은 크게 기뻐하였다(고후 7:6). 디도서 3:12에서 바울은 디도에게 아데마나 두기고를 보내 니고볼리에서 겨울을 나기를 희망했다.

   디도는 디모데와 같이 바울의 보조자로서 일했으며, 고린도 이외에도 사자로서 갔다(딤후 4:10). 이와 같이 디도는 바울이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이라고 불렀으리만큼 위로와 격려를 준 동역자이며 신뢰한 제자였다.

 

바울의 예루살렘 행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


예루살렘 올드시티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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