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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수리아 안디옥(안타키아)
운영자 2015-10-09 추천 0 댓글 0 조회 1865

 

 

(1) 지명 연구

안디옥('Antiovceia : an-tee-okh'-i-ah : 안티오케이아) '전차' 또는 '병거'란 뜻으로, 시리아왕 Antiochus(안티오코스)의 이름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전쟁이 많았던 시대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며 용맹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은 다른 안디옥이란 이름을 가진 도시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수리아라는 광역적 지명을 앞에 붙이어 수리아 안디옥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안타키야(Antakya)로 부르며 정식 명칭은 하타야(Hataya)이다.

   

(2) 역사적 배경

안디옥은 B.C.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그의 부하였던 4대 장군들이 헬라제국을 4등분 하는 과정에서 시리아 일대를 차지한 셀레우코스 니카토르(Seleucos Nicator)가 그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B.C. 300년에 세운 도시로 자신의 아버지인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현재는 터키의 안타키아(Antakya)로서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더불어 세계 3대 도시였다. 알렉산더 대제가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로 묶어 헬레니즘 문화를 창출한 도시였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B.C. 2세기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안디옥에 정착하여 A.D. 1세기에는 유대인의 수가 많이 증가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언어들도 상이하였다. 본토인들은 아나톨라어, 로마인들은 라틴어,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구스디아인들은 아프리카어 등 각기 자국어를 사용하면서도 헬라어를 공통으로 사용하였다. 안디옥은 수리아 지방의 로마 행정 수도가 되었고, 도시 근교에 헬라 여신 다프네 신전이 있었다. 예루살렘교회는 첫 순교자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한 후(7:59~60), 예루살렘에 핍박이 더욱 심하여(8:1) 그리스도인들은 지중해 연안 구브로섬과 소아시아 여러 지방으로 흩어졌다. 바울은 이러한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의 대도시에 이방세계를 향한 선교본부를 정했다.

안디옥은 이집트의 람세스와 히타이트의 무와탈리스 대왕간의 카데슈성을 놓고 자웅을 겨뤘던 오론테스 강상에 위치하고 있다. 오론테스 강은 지중해로 흘러드는데 해변의 강 하구에서 32km 거슬러 올라간 곳에 안디옥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오론테스강은 수량이 줄어들고 강바닥이 상승하면서 강으로서의 기능이 축소되었지만 당시에는 지중해에서 안디옥가지 32km나 강을 통해서 배가 왕래하였다. 그러므로 안디옥은 실루기아 지방의 중요한 항구로 자리를 잡았고, 동시에 육로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상업적인 거래가 활발하였다. 교역의 조건이 좋은 안디옥에는 마케도냐인, 헬라인, 시리아인, 유대인, 토착민 등이 섞여 살았다. 이런 다민족 체제는 다른 종교와 사상과 이론에 대한 수용성을 넓혔는데 현재도 이러한 특성은 살아 있어서 안디옥에 많은 외국인들이 살며 기독교인들도 약간은 활동의 자유로움이 있다. 이러한 특성은 스데반이 순교하면서 흩어진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유대인이면서도 비유대적 교리의 가르침은 이곳 사람들을 매혹시켜 기독교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더욱이 헬라제국을 무너뜨린 로마제국이 B.C. 64년 시리아를 점령하면서 안디옥은 시리아 지역을 지배하는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로마의 동방정책의 중심지가 되었다. 때문에 도로건설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안디옥과 로마를 연결하는 가도가 형성되었으며 이 도로 상에서의 치안은 비교적 안정되어 인적 물적 자원의 이동이 활발하게 되었다. 더불어 안디옥에서 성장한 기독교가 세계로 뻗어 나아가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바울은 이 가도를 따라 여행하며 복음을 전했다. 안디옥의 다민족 사회는 교회의 성장을 촉진시켰고, 이렇게 성장한 교회는 다시 로마의 잘 발달된 도로망을 따라 세계로 퍼졌다. 안디옥의 건설과 그에 따른 지리적, 상업적, 군사적 특성은 결국 복음의 전파 통로를 개설하는 것이었다.

 

(3) 성경본문

(13:1~3)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성령의 계시는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인 다섯 사람에게 임했다(13:1 이하). 다섯 사람 중 네 사람은 헬라파 유대인들로 바나바(Barnabas),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Simeon who was called Niger), 구레네 사람 루기오(Lucius of Cyrene) 그리고 사울(Saul)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와 함께 자라난 마나엔(Mamaen)으로 아마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배경과 활동으로 보아 이 사람들은 이방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이 예배하고 금식할 때 성령이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13:2)고 명했다. 여기 언급된 다섯 사람들은 모두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이었고 그들이 한 그룹으로서 금식하며 기도하고 사울과 바나바에게 안수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두 사람을 파송했다(13:3). 바나바와 사울을 안수하고 파송한 것은 어떤 개인이 한 것이 아니라 안디옥 교회 전체가 한 것이다.

안디옥교회는 최초의 이방인의 교회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최초로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방선교의 중심 선교센터가 되었으며, 교회의 사명을 잘 감당한 모범적 교회가 되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온 성도들은 각기 온 정성을 다하여 구제금을 모금하여 바나바와 바울 편에 예루살렘교회에 보냈다(11:27~30).

베드로도 안디옥에서 전도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전체 교회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권한을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에게 맡기고 아내와 함께 전도하러 떠났습니다. 안디옥에 이르러 복음을 전했습니다. 안디옥에 남아 있는 베드로 동굴교회는 이런 사실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4) 동역자 : 바나바

 

권위자(勸慰子)구브로 섬 출신의 레위인 요셉의 별명이다(4:36). 사도행전 13:15에는 분명히 권면한다는(paravklhsi", 파라클레시스) 뜻이 있고, 9:31, 15:31, 32도 역시 그럴 것이다. 이 이름을 가진 자는 친절하고 동정심이 많은, 그리고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기사에 의해 확증된다. , 바나바는 초기에 그리스도교에 개종하여 자기의 소유지를 팔아 그 값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바쳐 가난한 형제들의 구제 자금으로 하였다(4:36). 전에 기독교의 박해자였던 사울(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과 사귀고자 했지만, 다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제자됨을 믿지 않았으나, 바나바는 그를 데리고 가서 사도들에게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또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했는가를 자세히 이야기하여 그를 변호함으로써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없애주는 한편, 그는 사울의 시중을 들고 그의 불안을 덜어 소개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9:26,27). 바나바는 사도행전 11:24'착한 사람'이라 되어 있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였다고 했으니, 그는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도 본래 그 성품에 따라 아량이 넓은 자였으며, 영적으로도 담대한 은혜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렇게 그는 본래부터 착한 사람인데다가 영적 은사까지 충만했으니 만큼, 그의 목회하는 임지에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것은 정한 이치이다. , 안디옥 교회에서의 그의 큰역할을 볼 수 있다. 안디옥 교회에서 몇 사람의 구보로 사람과 구레네 사람들이 이방인에 대한 전도(유대인도 포함)에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보내 돕게 하자, 그가 가서 그 교회의 은혜를 알아 보아 인정하고 기뻐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즉 주와 동거하라고 권면하였다. 그 결과 큰 무리가 주를 믿게 되었다(11:19-24). 그리고 그는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리고 왔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의 중진 지도자 중의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위대한 사울을 등용하기를 기뻐하였다. 바나바는 사울이 받은 영적 은혜를 참된 것이라고 식별한 명견(明見)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안디옥에서 일 년간 큰 무리를 가르쳤다(11:25,26). 구브로섬 살라미스에 있는 바나바의 무덤 아가보의 예언대로 흉년이 들었을 때, 구제연보를 가지고 바나바는 사울과 같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11:27-30). 예루살렘에서 구제 사업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갈 때 마가를 데리고 갔다. 이것은 안디옥에서 출발된 바나바와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에 요한 마가와 동행하게 되었던 가능성을 알게 하여 준다(12:25,13:13). 안디옥 교회에서 선지자, 또는 교사라 일컬음을 받은 인물 중에 바나바가 들어있다. 바나바와 사울이 주를 섬겨 금식 기도할 때에, 성령이 "내가 불러 시키는 일"(외국 선교 사업)을 하라고 따로 세움을 받았다(13:1-3). 그들은 구브로 섬에서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로 전도여행을 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자를 고쳤다. 그 곳 주민들은 그들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 왔다고 생각하여 바나바를 그들의 최고신인 '쓰스', 바울을 '허메'라고 하면서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무리와 함께 와서 제사를 하려고 하던 사건이 일어났다(13:3-14:28). 이들은 구원문제를 놓고 유대주의자들과 다투었다. 교회는 이 문제 때문에 대표자로 이들을 예루살렘 교회에 파송되었는데, 이것은 일종의 총회의 성질을 띤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선교에서 본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을 보고하였다(15:1-3,12). 이 회의에서는(사도, 장로, 그리고 온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이방교회에 보낼 대표자를 택했다. 회의 결의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바나바와 바울에게 보낸다고 하였다(15:22,26). 이들은 안디옥에서 전도하다가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을 제안하자, 바나바는 친척인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자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제1차 전도여행 때 밤빌리아에서 떠나 자기들과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다고 반대하여 서로 몹시 다투었다. 이 다툼은 두 사람의 성격상의 차이에서 생긴 것이다. 바나바는 모성적이며 부드럽고 관용성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부성적이며 사랑이 많은 동시에 징계할 것은 징계한다는 엄격성이 있었다. 격론 끝에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수리아''길리기아'로 떠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다니면서 전도하였다(15:35-41,4:10). 이들이 서로 갈라지기는 했지만, 주 안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바나바에 대한 애정(고전 9:6,2:1,6,13,4:10), 1차 전도여행에서 신용 없이 중도에 집으로 돌아갔으나 회개하고 그의 유익한 보조자가 된 요한 마가에게도 칭찬을 보내고 있다(딤후 4:11).

 

 

 

 

 

 

 

 

 

 

 

 

 

 

                                  수리아안디옥의 베드로기념 동굴교회의 현재의 모습

수리아안디옥의 베드로기념 동굴교회의 내부전경

                                     수리아 안디옥의 베드로 동굴교회로 들어가는 굴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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