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돈
(1) 지명 연구
시돈(Sidwvn : sid-one' : 시돈)은 ‘어장’이라는 뜻이다. 현재 지명은 사이다(Saida)이다.
(2) 역사 배경
두로와 베이루트의 대략 중간이며, 두로의 북쪽 36㎞에 있는 베니게의 성읍인데, 지중해로 돌출한 구릉 위에 있다. 고대의 항구는 해안에 병행하고 있는 바위 산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어떤 부분은 17세기에 파괴되고 돌과 흙으로 메워졌다. 성읍의 산 쪽에는 방벽이 있고, 남쪽이 가장 높고, 거기는 성채가 서 있다. 성읍은 동산이나 과수원에 싸여 있다. 상업은 그리 성하지 않다. 시내와 그 근방에는 약간 부서진 화강암의 원주가 있고, 기타 각종 석관(石棺)이 부근의 묘지에서 발굴되었다. 현재 레바논 공화국 서남부의 항구 도시이다. 항구 북쪽과 남쪽에는 작은 섬들이 있어 거치른 파도를 막아 주어 좋은 항구로 되어 있으며, 오늘날도 많은 어선이 이 항구를 이용하고 있다.
베니게의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시돈의 주민은 어업 뿐 만 아니라 농업, 무역에도 종사하며, 그 입지적 조건은 시돈을 베니게의 유수한 성읍으로 만들었다. 성벽에 있는 큰 패총(貝塚)-이것은 무수한 불고동속 조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자주 물감의 원료였다-은 염색 공업이 고대 시돈의 중요한 산업의 하나였던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두로, 뷰브로스와 마찬가지로 시돈은 극히 옛날 성읍인데도 불구하고 그 발상(發祥)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델 엘 아마르나 문서(BC 14세기)에 이에 의하면, 두로는 애굽에 대해 충성한데 대해 시돈 왕 심레다(Zimreda)는 바로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도 아모리 족속의 왕 아시루('Aziru)의 맹우(盟友)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애굽은 시돈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고 있었지만, 웬 아몬(Wen-Amom, BC 1100 경)은 여전히 시돈과 교역하고 있었다. 힛타이트인 이나하빌이 북방으로부터의 `바다의 백성'(Sea Peoples)과 마찬가지로 시돈을 지배에 두려고 했으나, 시돈은 비교적 자유로운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시돈은 스불론(창 49:13)과 아셀 지파(수 19:28)의 북쪽 경계였다. 사사기 1:31에 의하면 시돈이 아셀에 포함 되어 있는 듯이 쓰여 져 있는데, 이 기사는 동시에 시돈이 한 번도 이스라엘의 영토로 된 적이 없었던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은 시돈의 신들을 섬기며(삿 10:6), 시돈 사람들의 압박 하에 놓여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 엿보인다.
시돈에 대한 예언자들의 태도는 정치적으로 보다는 아합 왕과 두로 왕 옛 바알의 딸 이세벨의 결혼 등에서 나타나 있는 이방신들에 대한 경배, 이교 문화에 의한 이스라엘의 정신적, 종교적 위기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두로가 몇 번씩이나 앗수르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데 대하여, 시돈이 앗수르에 반항한 것은 BC 705년 사르곤 Ⅱ세의 사후 처음이었다. 그러나 룰리(Luli)에 의한 반란은 산헤립에 의해 BC 701년 진압되었다. 룰리는 구브로로 도주하고 산헤립은 옛 바알을 그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옛 바알의 아들 압디밀굿데(Abdimilkutte)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앗수르 왕 에살핫돈은 이 성읍을 파괴하고 왕을 죽였다. 이는 BC 677년의 일이었다. 에살핫돈은 이 부근에 그의 이름을 붙인 새 성읍을 건설했지만 그로 말미암아 시돈이 다시 발전했다.BC 609-593년에 이르는 단기간 시돈은 애굽에 지배되었지만, 곧 느부갓네살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러나 바벨론의 통치는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고, 다시 바사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여기서 시돈은 다시 옛날의 중요한 위치와 어느 정도의 독립을 획득하였다. 그들은 크세르크세스 Ⅰ세의 해군을 위해 전함을 건조했지만, BC 480년 살라미스(Salamis) 해전 때 그것을 잃어버린다. 이와 같은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시돈사람은 아닥사스다 Ⅲ세 오쿠스(Artaxerxes Ⅲ Ochus)에 대해 BC 351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애굽의 사주(使嗾)를 받았지만, 아닥사스가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 왔을 때 실제로 아무의 도움도 얻지 못하고 당시의 왕 덴네스(Tennes)는 성읍을 버리고 도주하고, 성읍 주민들은 스스로 방화하였으므로 성읍은 잿더미로 되었다. 4만 이상의 주민이 그때 죽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BC 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시돈을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것도 하등 놀라운 것이 못된다.
시돈의 두 왕의 석관(石棺)이 19세기에 이르러 이 성읍 부근의 돌무덤에서 발굴되었다. 이 왕은 BC 300년 경의 다브니드(Tabnit)와 그 아들 에슈문아사르 Ⅱ세(Eshmun-'azar Ⅱ)이다. 다브니르는 자신을 `아스다롯의 제사장, 시돈 사람의 왕'이라 부르고, 그 아들은 그와 그의 가족이 아스다롯, 에슈문, 바알을 위한 신전 건조한 것을 자랑하고 있다.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에 시돈은 다시 거의 독립한 상태로 된다.
시돈은 여전히 오랜 번영의 성읍으로서 존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성읍 유일무이한 중요성은 서서히 상실되고, 독점적인 자주 물감의 기업도 여기에 이르러 깨어진다. 시돈은 초대 교회 이후의 역사에 있어서도 파란곡절이 많았으며, 특히 3세기에는 십자군과 사라센인이 싸운 싸움터가 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시돈은 사이다(Saida)라고 하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이다. 그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것으로는 십자군 성의 커다란 폐허와 시돈 항에 있는 루이 Ⅸ세의 요새 정도이다. 현재 그것은 중유 탱크로 이용되고 있다.
(3) 성경 본문
(행 27:3) 이튿날 시돈에 대니 율리오가 바울을 친절히 대하여 친구들에게 가서 대접 받기를 허락하더니 |
백부장 율리오(Julius)는 배가 시돈에 정박하고, 여객들이 내리고 승선하고, 물건들을 하역하고 선적하는 동안 바울로 하여금 시돈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 교제를 나누며, 그들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자유 시간을 주었다. 그 이유는 바울의 인격을 존중하고 신뢰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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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돈 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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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기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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