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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8. 가이사랴
박진숙 2021-01-19 추천 0 댓글 0 조회 564

18) 가이사랴

 

   (1) 지명 연구

 

     가이사랴(Kaisavreia : kahee-sar'-i-a : 카이사레이아)가이사의 성읍이라는 뜻으로, 헤롯은 가이사아구스도를 기념하여 명명하였다. 현재 지명에도 가이사라이다.

 

 

    (2) 역사적 배경

 

     팔레스틴의 지중해안의 항도(港都)인데, 그 유적은 갈멜 산의 남쪽 약 37지점에 있다. 고대에는 이 지방 제일의 중요 도시였다. 본래는 베니게에 속한 요새 도시(要塞都市)로서 `스트라톤'(Straton)이라고 불리우고 마카베아 시대에 알렉산더 얀나예우스에게 점령된 것이 기록되어 있다. 후에 로마 영()이 되었는데, 황제 아구스도는 이것을 헤롯 대왕에게 주었다. 헤롯은 가이사아구스도를 기념하여 `가이사랴'라고 성읍의 이름을 고치고, 12년간에 거쳐 대대적인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훌륭한 항구 도시로 일변시켰다. BC 10년에 완공한 다음에는 극장, 원형연기장(圓形演技場), 경기장, 수로, 황제 예배의 대신전 등을 갖춘 전형적인 헬레니즘 도시로 되었다. 이 항구는 본래 후미였던 것을 확장하여 대방파제를 축조하여 이 지방 제일 가는 안전한 항구로 만들었다. 헤롯의 착상은 옳았다. 이 항도는 팔레스틴 전체에 대한 교통의 요충지가 되어 정치적, 군사적으로는 예루살렘을 제압하고,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AD 6년 왕위를 빼앗긴 후는 로마 총독과 그의 군대가 여기 주둔했다. 헤롯 아그립바는 AD 44년에 여기서 죽었다(12:19,23,고대사). AD 66, 이 성읍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이것이 발단이 되어 유대 전쟁으로 번졌다. 그러나 이 성읍 자체는 로마 시대를 통하여 그 중요성을 잃지 않고 2세기에는 감독의 소재지로 되고, 이 감독은 451년까지 팔레스틴 지방의 대감독이었다.

또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195년에는 교회 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오리게네스(Origenes)가 가르쳐서 유명한 신학교가 설립되어 후에 가이사랴의 감독으로 된 유세비우스(Eusebius)도 여기서 공부했다. 그밖에 팜필로스(Pamphilos)나 히에로니무스(Hieronymus)등 위대한 지도자들도 여기서 나왔다.

     가이사랴는 548년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협동하여 기독교도를 습격하고 638년 회교도에 점령되었다. 1102년 십자군에 의해 회복되었으나, 1189년 사라딘이 이것을 도로 빼앗고, 1191년에 다시 십자군이 탈환했으나, 1265년 회교의 비루바스의 손으로 돌아갔다. 이스라엘 정부에 의한 가이사랴 유적의 발굴로 헤롯 대왕이 확장한 성읍을 내륙으로 향하여 반원형을 이룬 면적 15, 팔레스틴 제일의 성읍이었던 것이 판명되었다. 계단도로의 양쪽에는 하드리아누스(Hadrianus) 시대의 것이라는 황제상(皇帝像, 두부는 없음)이두 기(, 하나는 흰 대리석, 다른 것은 붉은 반암)가 마주 서 있다. 극장에서는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이 출토되었다(석회석, 높이 80cm, 60cm, 1세기). 갈멜 산에서 물을 끌은 도수교(導水橋)가 북쪽으로 뻗었는데, 그것은 높은 것과 낮은 것 두 줄이 남아 있다. 로마 시대의 유구(遺構)의 일부에 해자(垓字)로 구획된 면적 12의 중세기 유물과회당의 터가 있다. 거기는 `어린 양을 멘 그리스도'의 대리석상이 있다.

    해안은 선창으로 되어 있으며, 바울은 여기서 로마로 출항한 것이다. 19606월에 링크(A. Link)와 프린스톤신학교의 프릿치(T. Fritsch)Sea Driver 호로 해저 탐사를 하여 헤롯 대왕이 건설한 가이사랴의 항만 시설, 선창의 윤곽을 밝히고, 매몰된 것을 수다히 회수하였다. 항공 사진에 의해 선창의 무너진 윤곽이 거무스름하게 보였는데(높이 15m, 5.4m, 두께 2.7m의 거대한 장방형의 석회석을 깊이 40m의 해저에 무수하게 가라앉혀 그 위에 석숙을 쌓은 것) 그것은 십자군 시대의 선창의 3배 이상이나 해저로 뻗어 광대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한남서풍을 피하기 위해 북면에 항구가 건설되고, 선창 위는 넓은 길이 되고 만() 입구에는 가이사의 대리석상 두 기가 서 있었다. 해저에서는 개항 기념 메달로 보이는 것을 건져냈다. 한 쪽에는 수염이 난 바다의 신이 나체로 누워 오른손에는 뿔을 가지고 왼손은 짐승 위에 놓았다. 다른 쪽에는 두 척의 배, 항구의 입구, 두 상이 서 있는 탑이 새겨져 있다. 또 희랍어로 `가이사랴'의 약자인 KA가 새겨져 있다.

 

   (3) 성경 본문

 

 (행 21:8-9)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바울 일행은 그 다음날 남쪽으로 가이사랴(caesarea)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Philip) 집사 집에 여러 날 머물렀다. 빌립에게는 딸이 넷이 있는데 처녀로 예언하는 자들이었다(21:8-9).

훗날 빌립과 그의 딸들은 가이사랴에서 버가지방의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로 이사하고 거기서 복음을 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행 21:10-14)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그 때에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왔는데, 바울은 안디옥 시절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11:28). 아가보는 바울의 띠를 사용하여, 그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유대인들에게 결박되어 이방인들에게 넘겨질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아가보의 예언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도록 울며 권유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21:13)는 단호한 결심을 밝힌다. 바울의 결심이 그처럼 확고한지라,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하고, 더 이상 권유하기를 그쳤다.

 

                                          
                                                                             
가이사랴 항구 (1)

 

                                          

                                                                              가이사랴 항구 (2)

 

                                         

                                                                             물을 공급받는 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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